지은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좀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님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아팠던 건 알겠지만,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알긴 어려웠다. 그때 할머니가 질문했다.
"아가씨 그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오?"
짧은 머리의 그녀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잔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굉장히 섬세했고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할머니의 질문의 대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들 듣고 있었다. 그녀는 삐걱거리는 의자를 고쳐 앉아 앞을 바라보았다. 한참 잔을 만지는 손이 멈추고 손님은 그와의 만남을 얘기해 주었다.
그와 첫 만남은 헬스장이었다. 그도 그녀도 둘 다 그 헬스장 회원이었다. 손님은 퇴근 후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다녔는 데 그때마다 서로 마주쳤다.
둘은 그냥 헬스장 회원으로 서로 알고 지내며 1년이 지났다. 서로 대화한 적은 없었고 그냥 같은 헬스장 회원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건 그 사건으로 서로 대화하게 되었다. 사건은 이랬다.
그건 크리스마스 때쯤.... 운동을 끝내고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려고 했을 때 그의 다급한 외침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손님은 그 말을 듣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들거리는 손을 꽉 쥐고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말을 걸까 말까 고민 많이 했어요..!"
그녀는 그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상시에 운동 열심히 하시더라고요"
그녀는 평상시에 핸드폰을 보면서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말이 의아했다.
"아, 네.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본인이 운동하는 것을 좋게 봐준다니 좋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에게 짧게 인사하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하고 그녀의 집을 향해 갔다.
그 후로 그는 며칠 동안 헬스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에게 물어봐 알게 된 거지만 그는 그녀에게 차였다고 생각해 헬스장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여러 번 말을 걸었고 그 덕분에 서로 좋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녀의 말로 본인은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은 편이라 사람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 했다. 사람에게 데이고 남자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일단 내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지속적인 인사와 친절함은 그녀의 경계심을 풀었고 그에 대한 마음을 열게 해 주었다. 그녀가 사람에게 마음을 연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사람에게 마음을 열도록 도와준 그에게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아 점점 좋아하게 된 거죠...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되고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게 되고.... 그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항상 만날 때마다 뭔가를 챙겨주게 되었죠."
한참 기쁘게 말하던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던 거 같아요. 그는 점점 제가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저는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챙겨줘야 되는 관계가 되어버렸어요. 혹시라도 주지 않으면 제게 관심을 주지 않을까 봐 무서워서 멈추지 못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열도록 도와준 그에게 저는 집착하게 되었어요. 그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게 되었죠."
그녀의 등이 마치 풀이 죽은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굽어졌다. 그녀의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하였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일게 하였다.
"그와의 관계로 저는 마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진정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다는 게 뭔지...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지...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게 뭘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그녀는 입술을 다시 세게 깨물었다.
"그러다가 그 관계가 너무 버겁게 느껴졌어요. 그에게 점점 집착하는 제 자신이 무서워졌고, 그에게 계속 무언가를 주면서 관심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관계에서 도망쳐 나와버렸죠. 그 헬스장을 등지고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어요."
그녀는 흑당밀크티를 다 마셔 잔을 비우게 되었다. 그리고 비워진 잔처럼 그녀의 얼굴도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얘기를 하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편해져요. 아무에게도 말 못 했던 이야기인데.. 들어줘서 감사해요.. 그리고 처음 저의 무례에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아니에요. 저희가 말로 용기를 내서 이야기해 줘서 감사해요. 마음속 상처를 이렇게 꺼내서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알고 있어요. 용기에 감사드려요..."
그녀는 마음 아래에서부터의 숨을 모아 길게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와의 얽매임과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 때문에 그곳에서 빠져나왔는 데 그 관계를 끊어내길 잘한 거겠죠? 아직도 그가 생각나곤 해요..."
할머니는 길고 뻣뻣한 나무줄기 같은 손가락을 뻗어 잔을 들어 올렸다. 차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뱉는 그 숨에서 목련의 향이 배어 나오는 거 같았다. "관계란 서로의 존중과 배려가 기초예요. 누간가 끌려가는 관계는 좋은 관계라고 할 수가 없죠. 그 선택이 아가씨를 위한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이 된다면 그것은 맞는 선택이에요. 세상에 모든 순간 어떤 선택이든 그것은 그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에요. 때문에 그 어떤 선택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건 옳은 선택이에요."
손님은 그 말을 듣더니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빈 잔처럼 훨씬 가벼워 보였다.
"그나저나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 걸까요?" 잔을 치우는 지은 점장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