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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Dec 09. 2023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16

이런 게 상상력이고 창의력이지.

<Summer, 1563>

- Giuseppe Arcimboldo


1980년대에 중고등 시절을 보냈다. 당시엔 학교수업 잘 듣고 시험 직전에 교과서와 참고서 몇 번 읽고 시험을 치면 우등생 소리 듣는 거 어렵지 않았다. 우등생들은 주위에서 모두 수재(심지어 천재)라고 칭찬했다. 이런 똑똑한 학생들이 나중에 커서 사회 발전을 선도하는 인재라고 확신했다. 반면 시키는 대로 안하고 남들과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는 학생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다. 선생님과 부모님들로부터 '그래서 나중에 뭐가 될래?'라는 질책을 늘 받았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다. 사회의 주류와 다른 생각을 하면 좀 모자란 사람으로 매도되곤 했다. 개성이나 창의력을 발휘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였다.


몇해 전 빈 미술사 박물관에 갔다가 어떤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람 얼굴을 이렇게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이런 창의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하지 못했을텐데.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놀래킨 화가를 만났다. 바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다.


<Summer>. 빈 미술사 박물관 원본 촬영.


박물관에는 네 작품이 연달아 걸려 있었다. 모두 다 사람 얼굴이긴 한데 매우 특이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표현 방법이 엄청났다. 얼굴과 머리가 모두 과일과 채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눈은 체리, 코는 호박, 뺨은 복숭아, 광대뼈는 마늘, 이빨은 완두콩, 턱은 배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포도, 가지, 각종 베리 종류들로 표현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천재가 누군지 궁금했다. 설명을 보니 주세페 아르침볼도라는 화가가 그린 <Summer>라는 작품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1563년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짚으로 표현된 목과 어깨에 이름(Giuseppe Arcimboldo)과 연도(1563)가 쓰여 있다는 설명을 읽고 자세히 보니 진짜 있다. 와!! 대단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Winter>. 빈 미술사 박물관 원본 촬영.


그 옆에 있는 작품은 제목이 <Winter>였다. 제목만 먼저 보고 그림을 들여다 봤다. 온갖 싱싱한 과일과 채소들이 즐비했던 여름그림과 완전 대조적이었다. 헐벗은 나목(裸木)이 얼굴과 목을 덮었고 시든 나뭇가지로 머리카락을 표현하고 있었다. 생명력(또는 생동감)이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온갖 고생 하다가 말년에 모든 걸 내려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 같았다. 갑자기 렘브란트 자화상이 떠오른다. 잘 나가던 젊은 시절의 자신감 넘치던 초상화와 말년에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겸허한 자세로 늙어가는 초상화.


하여간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두세 걸음 떨어져서 보면 초상화지만 가까이서 보면 정물화였다. 한 작품에서 초상화와 정물화를 동시에 표현하다니, 창의성 끝판왕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아르침볼도가 1563년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사계>라는 이름의 초상화 4점을 선물했는데 그 중 두 작품이었다. 당시 궁정 신하들은 이 발칙한(?) 초상화를 보고 얼마나 떨었을까. 잔뜩 열받은 황제가 망나니 불러서 화가를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릴까 전전긍긍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황제는 파안대소하며 좋아했다고 한다.


<Water>. 빈 미술사 박물관 원본 촬영.


<Fire>. 빈 미술사 박물관 원본 촬영.


다른 두 작품은 제목이 <Water>와 <Fire>였다. <Water>를 보니 얼굴이 온통 물고기다. 입은 상어, 목은 뱀장어, 뺨은 넙치, 귀는 소라다. 얼굴 다른 부분도 온통 어류다.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림이 매우 사실적이다. 설명을 보니 62종의 어류와 갑각류들로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또한 <Fire>를 보니 머리에서는 장작불이 타고 있고 목에는 촛불이, 입 안에선 일회용 라이터 불 같은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이들은 <4원소>라는 시리즈의 일부로 이 둘 외에도 흙(Earth)과 공기(Air)가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 주장에 따르면 <사계>시리즈는 계절의 변화와 관계없이 나라를 통치한다는 의미이고,  <4월소> 시리즈는 자연까지도 통치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아르침볼도가 황제에게 바치는 무한한 아부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림으로 표현한 용비어천가였나 보다. 듣고 보니 그럴싸 하다.


아르침볼도의 기발한 상상력도 훌륭하지만 그걸 제대로 알아본 황제의 혜안 또한 대단하다. 자기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그려왔다고 단칼에 목을 날렸으면 화가나 작품이나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테니. 예나 지금이나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 두 사람의 콜라보 덕분에 명작은 살아남았고 아르침볼도는 수백년 후 태어난 초현실주의에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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