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예찬 Dec 19. 2023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19

패전국 여인들의 운명은..

<Andromache Mourning Hector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1783>

- Jacques Louis DAVID


<함락된 도시의 여자 : 1945년 봄의 기록>라는 책을 읽었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에서 독일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성폭행했던 기록에 관한 책이다. 그 무렵 베를린의 여성 민간인 수가 200만명 정도였는데 이 중 10만명 이상이 집단강간의 피해자였다고 한다. 물론 소련만 그런 건 아니다. 독일도 전황이 유리할 때 프랑스와 소련에서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 가해국과 피해국은 상황에 따라 뒤바뀔 뿐, 피점령국(또는 패전국) 국민들은 고통받고 모욕당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여성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참혹한 현실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 루브르 박물관 원본 촬영.

몇 해 전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Jacques Louis DAVID의 <헥토르의 죽음을 슬퍼하는 안드로마케>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영화 Troy에서 Eric Bana)가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서 져서 살해된 후 헥토르의 아내인 안드로마케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 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녀의 절규는 단지 남편의 죽음이 슬퍼서일 뿐만은 아닐 것이다. 곧 자신과 아들에게 닥칠 잔인한 운명을 예감한 듯하다. 트로이 전쟁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안타까운 상황임이 충분히 예상될 정도로 애통한 표정 묘사가 압권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더 처참하다. 안드로마케는 남편을 죽인 철천지 원수 아킬레우스의 첩이 되었고, "엄마 울지마"라고 하는 듯한 붉은 옷의 귀여운 아들은 그리스 군인들이 후환을 두려워해서 성벽 아래로 던져 살해했다. <쉽게 읽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에 보면 헥토르가 자신이 죽고 나면 아내가 어떤 운명에 처해질지 예언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누군지도 모를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아 무사가 눈물에 젖은 그대를 억지로 노예로 끌고 갈지도 모를 일이니, 그래서 아르고스에 살면서 베를 짜게 될 지, 아니면 지독한 모욕을 받으면서 샘에서 물을 길어 나르게 될 지..(후략).'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패전국 여성의 운명은 수천년 전부터 이러했다.


Paolo Veronese의 <알렉산더 대왕 앞에 모인 다리우스 가족, 1565>. 런던 내셔널 갤러리 원본촬영.

반면 아주 낮은 확률로 운이 좋으면 최악의 모욕은 피하기도 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20세기에도 패전국 여인들은 승전국 군대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는 판국에 기원전 시대에는 오죽했을까. 생사여탈권은 전적으로 승자의 손에 달려있었다. 트로이의 안드로마케가 그러했던 것처럼 당시 패전국 왕비는 승전국 왕의 첩이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에게 자비를 구한 다리우스의 가족을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어머니도 살려줬고 당대 최고의 미녀라 알려진 다리우스의 아내를 첩으로 삼지 않았다고 한다(대신 생포한 두 딸을 자신과 친구의 첩으로 삼았으니 어찌 보면 별 차이가 없긴 하다). 전쟁에 지면 패자는 왕족이든 뭐든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원래 이 작품은 Veronese가 베네치아의 한 개인 궁전에 결혼식 축하용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어쩐지 배경에 그려진 대리석 건물이 베네치아에 있는 건물들과 유사하다. National Gallery에서 편찬한 <A Quick Visit>이란 책에 보면 작품 속 주요인물(알렉산더, 왼쪽의 친구, 다리우스 어머니 등)들은 후원자 가족의 얼굴을 그린 걸로 추정된다고 한다. 화가가 작품에 후원자의 얼굴을 그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면 낸 돈이 전혀 아깝지 않겠다.


책 한 권 읽고 나서 몇 해 전 루브르 박물관과 내셔널 갤러리에서 감상했던 작품들을 떠올렸다. 당시에도 이 그림들을 보면서 전쟁에 진 나라 사람들의 운명이란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좀 뜬금없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끌려간 수만명의 민간인들도 생각했고. 기원전 12세기나(트로이 전쟁),  기원전 4세기나(마케도니아-페르시아 전쟁), 2차 세계대전이나..전시에 보여지는 인간의 본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