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는 없습니까?"

엄마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 (5)

by going solo


슬픈 인생을 살다

외로이 세상을 등진

'J'를 기리며






의사가 보호자는 없냐고 물었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내 담당 의사의 얼굴에 노골적이 곤혹스러움이 번졌어요. 또다시 불길했어요.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게 아닐까 하고요. 난 엄마가 폐가 좋지 않아 보건소에서 약을 타다 드셨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저 얼마 전에 그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기관지에 탈이 났을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진찰실로 들어설 때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뭔가 아뜩한 게 내 생각 속으로 밀려들었어요. 심상치 않구나 하고요. 그날은 진찰실의 공기조차 모두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것 같았어요.


마침내 의사가 뭐라고 핬는데 소리는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그이 입만 내 시야 속에서 뻐끔거렸죠. 아니 날아가 버린 건 그이 소리가 아니고 내 의식이었을 거예요. 그것은 어는 순간 듣기를 거부해 버린 것 같았어요. 소리가 나니 않는 그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이미 내 의식이 정지해 버렸기 때문에 그가 하려던 말을 모두 끝낸 것도 몰랐어요. 순간적인 무중력 상태. 그러니까 본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고 보니 어쩌면 죽음이란 게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있는 거,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의사가 잠깐의 무의식을 헤집어 나를 깨웠어요. 괜찮으세요라고요.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했죠. 그는 자기가 내린 최종 소견에 대해 나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어요. 나는 물었어요. 뭐라고 하셨냐고요. 그는 다시 난감해했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선고해야 하는 것 그건 의사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요. 한 다리가 천리길이라던데 차라리 보호자든 누구든 제삼자에게 라면 그 부담감을 좀 덜 수 있었겠지만 삶의 가망이 희박한 당사자에게 라면 더욱 그렇겠죠. 그는 처음부터 천천히 말해주었어요. 폐암입니다라고요. 듣기는 정확히 알아들었지만 이번엔 믿고 싶지 않았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오진일 거라고 단정했죠. 내일 다른 병원으로 가 봐야지라고도 생각했어요. 내가 폐암이 걸릴 이유가 없지, 난 길가는 바람에 묻은 담배냄새조차 지독하게 싫은데 술을 먹으면 응급실에 실려가야 하는데 왜, 뭐 때문에 폐암이냐고. 식습관이 불규칙하니 위암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은 있으려니 했겠지만 난데없는 폐암이라니, 이해도 안 되고 인정도 할 수 없는 것이 내 몸에서 정확하게 내 폐에서 자라고 있었어요. 의사 말로는 그랬대요.


엄마,

내 말짱하던 폐가 언제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을까요. 무엇 때문에요. 어쩌면 솜털 같은 바람을 입은 민들레 꽃씨가 어느 곳에서건 바람을 벗고 자리를 잡아 그것의 영토가 되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때가 되어 꽃을 피우 듯 어디선가 날아든 죽음의 씨앗이 잡은 자리가 하필이면 내 폐었던 걸까요.


의사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내 몸을 설명해 주었어요. 내 폐의 삼분의 일쯤을 암세포가 못쓰게 만들었다 고요. 곧 아주 구체적인, 심한 기침이나 백일해 각혈 같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장기에 이미 전이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중세도 동반될 거라고요. 진행 속도도 점점 빨라져서 1년을 장담하기가 어렵다고 했어요. 의사는 수술도 권하지 않았어요. 열었다가 그냥 닫아 버려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겠죠. 방사선으로 다스리기에도 늦은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내 몸이 죽기 위해 완벽하게 준비되어 가는 동안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 에요. 지금껏 삶을 위해 기능을 수행하던 모든 것들이 고요히 반란을 일으키고 마침내 불가역의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에게 선전포고를 해온 셈이죠. 난 그저 여분의 삶을 살면 그뿐이에요.


난 상식적인 사람인 것이 분명해요. 책이나 영화 그런 것 속에서 어떤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은 후 보여주던 반응들과 거의 같은 수순을 밟고 있는 걸 보면요. 지금은 그것의 최종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순응의 때를 살고 있는 중이에요. 오랜 갈등과 고통을 겪어 내고도 별 수 없는 걸 알게 된 아주 임박한 시점에서야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처음엔 대개 믿지 않는 걸로 시작해요. 그럴 리가 없다고, 다른 사람이 그런 거면 연민 가득한 표정으로 말할 수 있죠. 참 안 됐다고요. 남의 일로는 안된 건 안된 거고 사실은 사실로서 인정이 되는 일이 정작 내 것이라고, 그것이 내 몫이라고 판결이 나면 무조건 아니라고 해요.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누구든 다 그래요. 나도 그랬고 요.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뒤집을 수 없는 사실에 이제는 화가 나죠. 서슬이 퍼런 분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서 막 치밀어 올라와요. 마치 용암처럼 요. 뭐든 다 녹여버리고 싶어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관자놀이의 핏줄은 팽창돼서 금방이라고 시뻘건 피가 솟구쳐 오를 것만 같기도 해요. 왜 나고요. 내가 뭐를 그리 잘못했냐고요.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고작 마흔도 채 안된 나에게 왜 이러냐 고요. 하지만 그건 별개예요. 내 죽음과는 요.


최종 진단을 받던 그날 밤에도 여느 때처럼 기침이 나왔어요. 전날에도 기침을 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정도였는데 처음으로 가래에 붉스그레 한 것이 섞여 나왔어요. 그것은 마치 의사의 소견에 대한 마침표 같았어요. 그때까지 품고 있던 오진에 대한 기대는 여지없는 물거품이 되었어요. 다른 병원은 가 볼 필요조차 없음을 인정해야 했죠. 아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믿을 수 없다고 도리질을 쳐도, 차라리 지금 확 죽어버릴까 생각될 만큼 화가 나도 그건 별개예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죽음은 한순간도 쉬지 않는 진행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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