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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May 19. 2023

문학과 사랑

사랑과 불륜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

    문학은 대부분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인문학, 철학의 역사에서 사랑을 심오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는 성과는 희귀했다. 사랑은 늘 포착하기 힘든 변덕스런 감정이고 형이상학에 걸맞지 않는 분야이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기에 개인의 사적(private) 영역으로 등한시되었다. 특히 남 여 간의 사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애’ 즉 ‘성적욕망’은 거기에 철학적 함의를 대입하기에는 너무 곤혹스럽다. 그러나 ‘성애’를 배제한채 사랑을 다루는 것 또한 사랑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명확한 서사 상태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감정이 발효된 빵처럼 부풀어 올라 상대에 관해 천 가지 해석을 한다. 이에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아토포스’ 즉 ‘정체를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고 명명했나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연과 물질 현상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인간 최고의 테마는 자연, 물질 현상이 진화하듯 진화한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기존의 과학 이론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연애도 시대에 따라 관념적인 진화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랑 방식은 진부해지고 미래에 도래할 사랑의 유형은 과학적 진화와 연결되어 있다. 

    이 글은 ‘사랑’이라는 관념이 생물학적, 사회학적, 물리학적으로 어떻게 진화 했는지, 그런 경로를 밟은 철학적 사유는 무엇인지 문학 작품을 통해 밝혀보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는 사랑에 관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는 것이고 인간 존재를 쾌락과 불안 양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사랑”의 포착하기 힘든 관념을 관통함으로써 사랑으로 고통 받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위안이 될 것이다.        



    미국의 진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 1953~)는 최초의 인간들이 짝짓기 대상으로 누구를 선택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하여 ‘사랑’을 생존경쟁과 종족보존의 일환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의 논의는 다분히 생물학적이다. 남성의 육체적 특징과 여성의 육체적 특징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사건인 연애, 섹스, 결혼을 “성 선택”(sexual selection)으로 접근한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서 ‘성 선택’이라는 용어를 분리하고 ‘성 전략’(sexual strategy)이라는 사랑의 은유를 만들어 낸다. 연인들 간의 경쟁과 유혹, 밀고 당김은 전략의 과정이고 불륜은 더 많은 종족을 퍼뜨리기 위한 자연스런 본능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사랑’을 정의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자손을 상정하지 않는 사랑은 얼마든지 많으며,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독일의 사회 과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사랑’을 사회 진화론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그는 사랑을 ‘열정’(passion)이라는 단어로 대치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열정의 진화를 추적한다. 우리 인간 종족이 자연 상태의 짝짓기에서 결혼 제도로 진입한 배경, 결혼에 사랑이 개입한 배경, 결혼에서 사랑이 배제되는 시대 등을 생물학적 근거가 아닌 사회, 역사적 진화로 바라본 것이다. 루만은 17세기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사랑,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 특별한 사회적 기류로 이루어진 후, 현대에는 다시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은 데이비드 버스의 설명보다 더 포괄적이다. 그러나 루만은 사랑의 시간적 맥락은 추적했으나 왜 사랑의 형태가 존재론적 진화를 하는지 근본 이유는 논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인간의 마음의 문제를 물리학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양자 역학적 해석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의식(consciousness)이라 불리는 정신적 삶과, 제도(institution)라는 사회적 삶이 거시적 양자역학 현상이라는 이론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수학의 상징물들이 실제 물질 대상의 역학적 속성에 상응하는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들이 측정될 때 잠시 어떤 속성의 가능성으로만 나타난다. 알렉산더 웬트에 따르면 과거 경험도 마치 물질을 측정하듯 현재의 선택에 의해 행위의 성격이 바뀌는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 과거도 변한다는 이 깜짝 놀랄만한 이론은 “사랑”이 변질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큰 효용이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이 그 열정의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감정상의 파장이 일지 않는다. 고전물리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의 진화가 “사랑”을 다루는 관점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다양한 내러티브로 구성되는 결맞음 현상이며 상태 함수에 따라 급격히 붕괴되는 하나의 파동이다.

    

     이 글은 데이비드 버스가 차용한 “짝짓기 진화”와 루만의 “사회진화론”, 알렉산더 웬트의 “양자마음과 사회과학(Quantum mind and Social science)”을 중심으로 사랑의 모습이 어떻게 진화되고, 과학 이론이 사랑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문학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 안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를 살펴보자.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     

   

. “짝짓기의 진화적 기원으로 본 불륜 


   미국의 진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David Buss, 1953~)는 최초의 인간들이 짝짓기 대상으로 누구를 선택했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하여 ‘사랑’을 생존경쟁과 종족보존의 일환으로 파악하려 한다. 그의 논의는 다분히 생물학적이다. 남성의 육체적 특징과 여성의 육체적 특징을 중심으로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사랑의 사건인 연애, 섹스, 결혼을 삶의 조건으로 접근한다. 그는 다윈의 ‘자연선택’에서 ‘성 선택’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성 전략’이라는 사랑의 은유를 만들어 낸다. 연인들 간의 경쟁과 유혹 밀고 당김은 전략의 과정이고 불륜은 더 많은 종족을 퍼뜨리기 위한 자연스런 본능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사랑’을 정의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자손을 상정하지 않는 사랑은 얼마든지 많으며,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불륜에 관한 소설이다. 인간의 짝짓기 가운데 대다수는 윤리적이라 볼 수 없다. 예컨대 성적인 목표를 무자비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남녀는 경쟁자를 깎아 내리거나, 이성을 기만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배우자를 파멸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성정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실망감을 안겨주는 부분이다. 데이비드 버스는 「짝짓기의 진화적 기원」에서 인간의 짝짓기에서 경쟁적이고, 갈등을 유발하고, 속임수에 능한 측면은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면은 반드시 존재하고 이때의 성전략(sexual strategy)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 다시 말해 배우자를 얻는 수단이다. 짝짓기, 연애, 섹스, 그리고 사랑을 근본적으로 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관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무작위적으로 파트너를 선택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대상에게 접근 할 수도 없다. 그 선택은 반드시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를 사로잡는 그 대상을 쟁취하기 위한 진화적 적응(adaptation)은 생존과 번식에 관한 문제를 풀기 위한 해결책이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서 자연선택은 체내 영양분 공급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배고픔이라는 기제를 우리 몸에 장착 시켰다. 지방과 당분에 민감한 혀는 무엇을 입 속에 집어넣어야 하는지, 견과류나 딸기는 입어 넣어도 되지만 자갈이나 진흙은 넣지 말 것을 알려준다. 미각, 더위나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땀샘과 떨림 기제, 포악한 육식동물 같은 위험한 적수에 대한 판단력, 잘 대처하게끔 맞서 싸우거나, 바로 도망가게 해주는 두려운 감정, 질병과 기생체에 대항하는 복잡한 면역체계도 모두 마찬 가지이다. 이러한 적응들은 자연의 엄정한 힘에 맞서 생존을 위해 풀어야만 했던 인간의 해결책이다. 즉 우리의 생존 전략인 것이다. 이처럼 생존에 필요한 특질들을 갖추지 못한 조상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런 생존의 적응 문제는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느 곳에서나 선호하는 배우자감이나 기피하는 배우자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성적 욕망은 다른 욕망들과 비슷하게 선호에 의해 진행된다.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를 생존상의 문제와 연결시켜보자. 만약 우리가 맛에 대한 어떤 선호도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입에 집어넣는다면 우리의 생명은 연장될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다. 배우자에 대한 욕망이 꼭 생존 본능과 유사한 것은 아니지만 삶을 식욕에 대입해 볼 때 연애 본능도 어쩌면 개개인의 삶의 욕망에 지배당할지 모른다는 유추를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생존과 번식만을 위하여 짝을 짓고 결혼을 한다면 결혼 후의 혼외정사는 설명이 모호해 진다. 이미 욕망이 달성된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기적인 짝짓기에서 요구되는 지속적인 헌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은 때로는 일시적인 방탕, 스쳐 지나가는 밀회, 짧은 혼외정사를 간절히 추구하곤 한다. 결혼 제도가 없던 시절 ‘불륜’이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짝짓기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려던 것이 결혼의 탄생이다. 그런데 공인받은 성적 영역(sexual domain)은 사회적 진화와 함께 다시 그것을 해체하려는 욕망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의 발현이 “불륜”이다.      

   

 사회학적 진화로 본 불륜     


    인간의 연애 감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학자가 있다. 독일의 사회 과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다. 그는 ‘사랑’을 사회 진화론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사랑을 ‘열정’이라는 단어로 대치하고 역사적 맥락에서 열정의 진화를 추적한다. 우리 인간 종족이 자연 상태의 짝짓기에서 결혼 제도로 진입한 배경, 결혼에 사랑이 개입한 배경, 결혼에서 사랑이 배제되는 이유 등을 생물학적 근거가 아닌 사회, 역사적 진화로 바라본 것이다. 루만은 17세기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사랑,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이, 특정한 사회적 기류로 정착이 된 후, 다시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은 버스의 설명보다 훨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루만은 시간적 진화의 맥락은 따라갔으나 근본적으로 사랑의 속성이 왜 변화하는지 근본 이유는 논하지 않았다. 루만에 의하면 ‘사랑’이라는 서사는 개인화와 사회화라는 인간의 기본 생존 양식에서 친밀성이라는 코드를 장착하려는 한 영역이다. 우리는 동물이 교미를 한다고 말하지 사랑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특별히 형성된 인간만의 사적 감정이란 뜻이다. 사회를 경제체계로 파악하는 사람들은 사회가 대부분 비인격적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 안에서 인간적 관계에 집중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거나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다. 과거의 사회구성체들과 비교할 때 현대 사회는 비인격적인 관계 뿐 아니라 인격적 관계까지도 증가하는 이중의 증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적 모임에 가담할 수 있다. 이렇듯 내포적 관계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인간들 간의 ‘상호침투 즉 친밀관계의 확장이라고 명명한다. 상호침투는 한 체계가 그 환경의 특정한 체계와 상호 호환 작용관계에 놓여있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상호침투에는 점진적인 시간적 침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개념은 구체적으로 하나의 개별 인간, 그의 기억들, 태도들을 형성하는 총합에 타인은 결코 단번에 다가갈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 상호침투를 가장 밀도 있게 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이상화하고 신비화하는 문학적 표현들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와 그 변화 추세에 반응한다. 사랑은 상호보편성이며 삶의 모든 상황에서 상대를 계속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이 시간이 지나자 인지적으로 너무 피곤한 일이 된다. 차라리 서로를 이해시키느니 감정의 불안정을 감수하는 편이 더 쉽다. 사랑의 특수함이란 비대칭성 속에서 도 행위로 답해야 하는데 이것이 의무가 되자 피곤하고 불쾌해 진다. 사랑은 점차 소통의 밀도를 높이는 병광기정신병사슬에 묶이는 것이 된다. 이에 사회적 체계에서 사적 체계로 독립 분화하려던 사랑은 어느 사이에 다시 사회 체계의 한 가운데 존재함이 드러난다. 새로운 감정의 독립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 “불륜의 토대     

  

    불륜은 비이성적이고 허황되며 불안정한 상태의 한 장르이다. 사랑을 테마로 다룬 문학 작품 중 불륜이 소재가 되지 않은 적은 없다. 인간의 삶에서 불륜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의 진화 과정에서 불륜의 토대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사랑을 열정에 사로잡힌 서사로 정의 내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사실 17세기 이전 중세 시대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개인들 간에 공인화된 감정이 아니었다. 귀족의 결혼은 정략으로 이루어지고 평민의 결혼은 태생에 맞는 경제, 사회체계의 근접성으로 이루어져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고대와 아라비아의 연애서정시나 중세의 연가문학,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사랑문학은 개인 간의 정사, 관능적 행위는 배타적으로 보고 사랑을 ‘이상화’라는 높은 차원으로 격상 시켰다. 궁정풍의 거리두기와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격정 사이에서 여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아름다운 사랑의 전형이었다. 사랑은 끌어당기는 대상의 완전함에서 고유의 정당성을 발견해야 했다. 이런 사유가 17세기까지 이어졌고 중세의 연가문학 이래 우정 및 자애의 전통과 더불어 구애를 할 때는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로부터 자기존중과 자기지배를 인정받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데 17세기에 하나의 전환점이 일어난다. 여성이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즉 사랑 관계에 자율성과 의지가 서서히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로서 주체적인 여성은 요조숙녀와 요부로 구분된다. 요조숙녀는 항상 ‘No’라고 말하고 요부는 항상 ‘yes’라고 말하는 여성이다. 이에 점차 사랑은 욕망의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제 사랑에 빠질 것이냐 말 것 이냐는 둘이 눈이 맞는 ‘이중의 우연성’에 맡겨지게 된다. 이로서 사랑을 선택할 자유가 생겼다는 것이며 이것은 기혼자나 혼외 관계자들까지 해당되었다. 사랑은 더 이상 청혼이나 결혼만으로 정당화 될 수없는 개인들의 일이 되어 17세기 중반쯤 사랑의 윤리를 둘러 싼 새로운 판본이 나오게 된다. 

    사랑을 결혼의 조건으로 상상하는 사유가 증폭되자 사랑 자체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이전까지 결혼은 신분적, 물질적 관계에서 이루어졌기에 어쨌건 위상은 공고했다. 그러나 사랑’ 이라는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쾌락을 주는 대신 지속성이 없었다사랑의 중심에는 변덕이 자리 잡고 시간에 의해  훼손되기에 사랑이란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에 연인들은 지속성이라는 허구를 상정하고 불안정한 것을 안정적인 것으로 정식화한다. 바로 사랑에 앞 서 ‘열정이라는 개념을 정착화 한 것이다.  이로서 사랑은 이성과 신중함으로부터는 거리가 멀어지고 과도함이 척도가 된다. 이제 열정만이 사랑으로 인식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자 성적 방종으로 치닫던 프랑스 상류 사회에서 섹슈얼리티와 사랑이 통합될 수 있다는 관점에 나온다. 이는 점차 확대되어 영국에서는 사랑과 결혼의 결합이 천명되게 된다. 하지만 이것에는 치명적 약점이 숨어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 여성은 순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다시 섹슈얼리티의 차단을 의미하게 된다. 이로서 굴레를 이탈한 사랑은 외설로 평가된다. 그리고 사랑의 의미는 낭만주의로 환원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열정에 사로잡히면 말더듬이가 되어 소통이 교란되었다. 소통 불가능의 경험 뒤에 낭만주의가 이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낭만적 사랑은 자기중심적 개성을 원칙으로 삼기에 결혼을 바라지 않았다. 사랑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 확인뿐이었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환상과 현실에 대해 새로운 확인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 이른다사랑하는 사람들은 고요히 머물러 있지 않고 상호침투의 관계를 재생산 한다즉 사랑은 사랑의 법칙을 제도가 아닌 스스로 부여하게 진화한 것이다.     

     

                     Ⅳ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짝짓기에서 영원성의 추구로 진화-


    안톤 체홉은 러시아의 극작가 이며 소설가이다. 그의 많은 단편 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는 불륜의 가장 전형적인 과정과 그에 따르는 고뇌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명작이다. 이 소설은 구로프와 안나의 불륜을 통해 사랑에 의한 결혼이 더 이상 내포적인 상호침투의 소통의 장이 아님을 드러낸다. 소통은 두 사람만의 환상의 영역이며 사회가 진화함에 따라 사랑도 진화했다는 것이다. 사랑은 통합하기 힘든 정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설명하기 난해하지만 시대적 진화를 이것만큼 잘 드러내는 장르는 없다.

     드미트리 구로프는 휴양지 얄타로 여행을 떠났다가 거기서 젊고 아름다운 안나 세르게예프나를 만난다. 역시 휴가차 얄타에 온 여자다. 그녀는 힌 색의 포메라이안 개를 데리고 해안 산책로에 나타나곤 한다. 여성 경험이 많은 구로프는 호기심이 동해 여자에게 접근하고 둘은 사귀기 시작한다. 두 사람 다 배우자가 있는 기혼자이다. 평소 여자들을 ‘하등 족속’으로 취급하던 구로프에게 안나는 여느 여자와 다를 바 없는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한 번도 여성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신선하고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두 사람은 깊은 관계에 빠져 휴양지를 떠나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 간 후에도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른다. 모든 불륜 소설이 그렇듯이 불륜의 시작은 촉발적인 열정이다. 이는 대체로 성적 욕망과 연루되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부적절한 성관계를 몇 차례 치른 후에 그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몇 몇 소설 중에는 그 열정이 예전 삶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거나 사회적 굴레에서 이탈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바로 안나 세르게예프와 구로프의 경우가 그러하다. 

      구로프는 천성적인 바람기를 가지고 이 여자 저 여자를 탐닉하며 바람을 피웠지만 안나의 경우에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녀와 있으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른 아침 햇살에 그녀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바다니 산이니 구름이니 광활한 하늘이니 하는 마법과도 같은 이 모든 아름다운 광경에 마음이 누그러지고 넋을 잃은 젊은 여자와 나란히 앉아서 구로프는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워. 더 높은 인생의 목표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망각하고 저지르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제외한 모든 것이 말이지...(체호프)"      

  


구로프는 자신이 왜 안나에게 그토록 끌리는지 그녀와 만난 이후에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상의 삶이 허깨비처럼 다가오고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만이 숨을 쉬고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안나와의 이중생활을 시작하며 자신의 영혼도 이중으로 분리되어 현실의 껍데기는 속임수로 가득 차 있고 삶의 핵심은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만 진실하게 진행된다고 느낀다. 두 사람은 도둑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수밖에 없으니 세간의 잣대로 보면 망가진 삶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시간이 개입한다. 니클라스 루만은 그의 책에서 연인들 사이의 희망은 현실과의 비교를 통해 해체가 가속화 된다고 언급한다. 그들의 관계는 고유의 시간성을 따라 잡지 못해 해소되고 만다. 작가 안톤 체홉은 이 두 사람의 현재 열정에 비해 미래의 어음을 상환할 때 드는 비용이 훨씬 비싸다는 점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녀를 안아주고 우스갯소리도 해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머리는 이미 희끗희끗해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렇게 많이 늙고 이렇게 많이 풍채를 잃었다는 게 기이하게 생각됐다...안나의 어깨는 따뜻했지만 그녀는 떨고 있었다. 아직은 이렇게 따스하고 아름답지만 머지않아 자기처럼 시들고 기울어버릴 그 생명에 그는 연민을 느꼈다. 왜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가?...(체호프)"     

  


    시간의 잠식을 통해 사랑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상상의 날개를 달아 주었던 사랑의 속성은 녹아 없어지고, 기쁨은 익숙함으로 대체된다. 대단한 미인도 전보다 덜 예뻐 보이고 추남도 전보다 봐줄만하다. 실재에서 상상으로의 코드 전환이 시간적 부식에 노출되어 역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사실 사랑은 그 자신의 본질 자체, 즉 그 과도함으로 인해 반드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러니 ‘열정’이라는 기제로 사랑을 포장하고 그것을 지속하려는 강박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는 자명하다. 시간적 구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결혼의 분리를 강제한다. 이제 사랑의 의미는 시간적 구조를 견디느냐 마느냐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예를 들어 사랑의 신이 격노하여 연인들을 결혼으로, 따라서 타락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혼에 골인하는 것은 연인을 잃는 명예로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결혼생활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성은 어떻게 처리 되어야 하는지 늘 문제가 된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도 타당하다. 이런 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라 사랑을 독립분화 시켜 시간성에서 가려내기 위한 논변이다. 이로써 ‘불륜’은 과도함으로 지탱하던 사랑이 쓸려간 자리에 오히려 순수함이라는 감각으로 다시 밀려온다.        구로프는 안나와의 불륜을 지고한 사랑으로 대치하려 한다. 



"그와 안나 세르게예프나는 한없이 가깝고 친밀한 사이처럼, 남편과 아내처럼, 서로 아끼는 소중한 친구들처럼 서로를 사랑했다. 운명이 두 사람을 짝지어 준 것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왜 그녀에게 남편이 있고, 그에겐 아내가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인간들의 손에 잡혀와 각 각 다른 새장에 갇힌 암수 한 상의 철새 같았다(체호프)"     

   


이런 강조가 전제하는 것은 사랑을 형이상학적 장르로 진화시킨다는 것이다남 여 간의 사랑을 시간성의 개입에 의해 흐려지거나, 감정의 반복된 훼손으로 휘발한다고 보지 않고 지고한 아름다움을 향해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본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라는 현명한 여인의 사랑론에 입각하여 사랑을 정의한다. 디오티마는 사랑은 욕망인데 그 욕망이 지향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명쾌하게 답을 준다. 그런데 그 행복은 어느 때에 오는가? 행복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가질 때에 밀려오는 감정이다. 그럼 여기서 좋은 것에 대한 의미 규정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좋은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진지한 열정에 사로잡혀 상대를 탐하게 되는가? “그것은 육체던 영혼이던 아름답다는 사유에 빠질 때 그것을 향유하기 위한 감정이다.”라고 디오티마는 답한다. 즉 우리 인간은 신적인 것과 조화를 이루고자하는 본연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지향점을 향해 진화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추구이고, 아름다움을 낳고자 하는 열망이며, 시간에 종속되지 않는 영원한 아름다움 자체를 향한 전진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의 불멸성에 동참하고 싶다. 

     구로프는 안나를 통해 단조롭고 공허한 삶 속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구원을 의식한다. 안나 이전의 바람이 난 여자들이나 자신의 아내에게서 풍기는 하등 동물의 냄새 대신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직관하려는 슬픈 서약에 동참한 것이다. 디오티마는 이것을 사랑의 사다리, 형이상으로의 상승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사랑의 신비로 인도된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놀랄만한 아름다움의 어떤 본성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는 거의 마지막 단계인 목표에 도달한 셈입니다. 사랑의 신비에 바로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서 시작해서 저 아름다움 자체를 향해 사다리를 계속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둘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아름다운 행동으로, 이어서 아름다운 학문으로, 다시 아름다움 자체를 인식해, 결국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을 직관하게 되는 것입니다(플라톤이 인용한 디오티마의 서사)"              



체홉이 이 단편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확해 진다. 불륜이라는 비윤리적 상황에 괴로워하는 연인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편을 쓴 것이 아니다. 제도적으로 사랑을 파악하는 것은 너무도 진부하다. 데이비드 버스는 불륜을 종족을 더 퍼뜨리기 위한 생식적인 욕망이라고 정의하고, 니클라스 루만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독립분화에서 역행하여 다른 사랑의 장르를 만들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문학은 우리에게 사랑은 육체적 열정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국 인간 존재가 지향해야 하는 아름다운 영원성으로의 진화과정이라고 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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