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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May 31. 2023

두 달 뜨는 밤

       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 작교선          

                                         


                                                                                  

            


            오색구름이 기묘한 형상으로 피어오를 때

             직녀성은 견우성을 만나러 아득히 먼 은하수를 건너간다.

             백로에 가을바람 불고

             그 좋은 날에 단 한 번의 만남

             그것은 인간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닳고 닳은 속된 만남보다 

             훨씬 더 값진 만남이리라.

             은은한 정이 물결처럼 흐르고

             아름다운 시간은 꿈결처럼 흘러가

             오작교 건너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리라

             둘의 사랑이 영원불멸의 진실한 것이라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세속의 사랑과 닮아 무엇하리...     


   농익은 은행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아리는 시월 중순 즈음이 되면 쓸쓸한 마음과 더불어 외가 마당에 서있던 은행나무와 할머니의 채취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른다. 나의 외조모는 작교선이라는 이 시를 좋아하셨다. 시를 읊거나 경을 읽어대시는 할머니의 비음은 내게 마취제인양 녹아들었는데 낭랑하게 울리면서도 애가 잦아드는 듯 슬픈 꺾임이 지금도 바람결처럼 내 뺨에 묻는 듯하다. 할머니는 늦은 점심을 드신 후 해가 뉘엿뉘엿 너머 가는 초저녁에 유독 기가 발하시는 것 같았다. 그때는 외갓집 윗방에 샛노란 알전구가 밝혀지고 부엌에선 큰 이모와 외숙모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저녁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달그락 거리는 그릇 소리와 시큼한 진니국 냄새, 뜸 들은 밥에서 모락거리는 김이 자유분방하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시간,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운 나는 금방울전이나 숙영낭자전에 빠져 들었고 할머니의 책 읽는 소리는 더욱 낭랑해졌다. 할머니가 잠시 숨을 고르는 그 촌각의 침묵은 내 글 읽기에도 틈새를 주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금방울이 되어 방안을 또르르 굴러다니기도 하고 요염한 선녀가 되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책에 빠져들 양이면 할머니의 옷고름을 툭툭 잡아당겼고 그 마음을 알아차린 할머니는 목련꽃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다시 소리 내어 책을 읽곤 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성을 잊을 수가 없다. 노란 백열전구의 휘황함, 머리맡에 놓인 명랑 봉지, 할머니가 책갈피로 사용하시던 흑단 참빗의 향내, 따뜻한 아랫목에서 피어오르던 종이 장판의 콩기름 냄새를 말이다. 공간을 부유하는 할머니의 책 읽는 소리와 웃방 천장에서 쥐들이 달음질치는 소리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내 삶의 가장 안온한 아우라가 되어 쓸쓸하거나 허전할 때, 혹은 세파에 속이 시끄러울 때 내 영혼이 기거하는 고요한 안식처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온해지고 행복해지려면 소리 내어 읽을 한 권의 책과 따뜻한 아랫목, 설탕물 한 종지면 된다는 것도 말이다. 


                 *              *               *     

   할머니는 신전에 불을 밝히듯 밤마다 외가 뒷마당에서 제를 올리셨다. 그리 호사스러운 촛대는 아니었다. 누런 놋쇠 사발에 굵고 하얀 초를 우뚝 세우고 하얀 쌀을 한 움큼 돌려놓은 소박한 촛대였다. 초가 너울거리며 촛농을 흘리는 동안 그 주변으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어느 밤이나 의례적으로 하는 행사였고 어릴 적부터 외가에 갈 때마다 보는 광경이기에 나에겐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늘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초 한번 보고, 할머니 한 번 보고를 반복해서 했다. 이상하게도 그 광경은 친근하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할머니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커다란 존재와 소통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알아듣지도 들리지도 않는 웅얼거림이 손바닥을 바삐 비비는 할머니의 주변에서 실타래 뽑듯 흘러나왔기에 나는 할머니의 손바닥이 마치 말을 하고 있는 듯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끔 할머니는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가 다시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뭘 비는 거야?”

   “우리 아가 명 길고 복 많으라고 신령님께 기원했지...”

   “또?”

   “달달 봉사처럼 마음으로 보라고도 했지!”

   “달달 봉사가 뭐야?”

   “봉사가 더듬거리며 조심조심 세상을 알아 가듯 겉 넘지 말고 신중하라는 거지...... 인간 세상 유람하는데 그 두 가지 말고 또 뭬가 필요한고?”

‘명과 복을 품고 마음으로 보라’는 할머니의 그 말씀은 지금도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명과 복은 하늘이 내리시는 것이니 그렇다 치지만 그 뒤를 잇는 마음으로 보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주문인가. 눈이 메어지도록 현란한 볼 것들에 압도당하여 마음은 찾을 수도 없는 곳으로 실종된 이 시대에 말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 끝없이 방랑하는 것이 삶의 여정이며 인간이 치루는 업보인지도 모른다. 사실 할머니께서도 이 삶의 지표를 홀로 터득하신 것 같지는 않다. 당신도 자신의 외조모님께 전이된 것이다. 옛 이야기와 담바고의 향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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