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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ADHD를 치료하지 않기로 결정한 6개월

문제를 인지하자 더욱 극심해진 증상과 불안

by 민민

성인 ADHD 검사 후 치료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의사 선생님 소견에 따라 약물 치료를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출근을 했으나, 내가 ADHD가 맞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로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생겼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어떤 행동을 할 때 ADHD로 인한 증상임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나의 성격적인 부분이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검사 결과를 기반으로 ADHD로 인한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행동들을 할 때 불쑥 '아 이게 ADHD증상이었구나'하고 자각하는 방식이다.


1화에서 내 증상들에 대해 간단히 적기는 했으나, 이번 편에서는 좀 더 자세한 증상과 6개월간 느낀 사례를 작성해보려고 한다.

하나의 증상으로 하나의 문제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증상들의 콜라보로 복합적인 문제가 이어진다.


일이나 스케줄의 계획을 잘 세우지 못하고 의지가 약해 일을 미룬다. 심지어 기억력도 안 좋아 내게 주어진 일 자체를 까먹어 버리기도 한다. 기억력이 안 좋다는 것은 챙겨야 할 물건을 깜빡한다거나, 아예 잃어버린다는 귀여운 문제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잊어 당황스럽게 만든다.


어느 날은 매일 입력하던 회사 시스템 비밀번호나 개인 사물함 비밀번호도 잊게 만들었다. 사물함 비밀번호 입력을 서른 번 이상 시도했음에도 도저히 기억나지 않아 조용한 사무실에 삑삑하는 오류 알림 소리를 퍼트리며 진땀을 뺀 적도 있고, 잠시 나간 집 현관에서 내 집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또 삑삑거리며 15분을 동동거리며 서있었던 기억도 있다.


시각과 청각 정보 처리가 잘 되지 않는다. 글을 읽을 때나 들을 때 (문장의 중간이 괄호 쳐지고, 돼지꼬리 넣은 것 마냥) 사라져서 읽히고 들린다. 글은 내가 이해할 때까지 다시 읽으면 되지만 대화를 할 때는 상대에게 내가 이해할 때까지 무한대로 설명해 달라고 할 수 없으니 난감하다. 게다가 상대방의 발화가 1분 이상 길어지면 중간에 다른 생각이 불쑥 찾아든다. '아까 먹은 점심 얼마더라?', '아까 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는데 무슨 의도지?', '아 이따 3시에 미팅이 있지?' 등등.. 듣지 못한 말을 앞뒤 문맥과 분위기로 추측해 가며 살아왔다.


시각 정보 처리가 안 되는 부분은 검사 전에도 인지하고 있었으나, 청각 정보 처리가 되지 않는 부분은 검사 후 알게 되었다. 앞뒤 문맥으로 의미를 추측하며 대화하는 방식은 이십여 년간 자연스럽게 단련되어, 내가 이런 방식으로 대화한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대화 중 다른 생각이 끼어들 때는 길게 말해 나를 지루하게 만드는 상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고작 1분 남짓의 시간조차 버티지 못하는 나의 문제라는 점을 몰랐다.


횡설수설 말한다. 말 그대로 나는 굉장히 횡설수설 말한다. 글을 쓸 때도 그렇지만 말을 할 때는 극에 달한다. 검사 전에는 단순히 '내가 말을 잘 못한다.'수준으로 생각했는데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치료를 미룬 6개월 동안 업무가 바뀌어, 더 명확하고 정확하게 말해야 할 중요성이 높아졌던 배경도 있다. 증상을 인지하게 된 나와 더 어려워진 업무 환경은 나를 극한의 스트레스 상태로 몰고 갔다.


게다가 인지하지 못했던 상대방들의 반응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동료들은 친절하고 착해 단 한 번도 "OO님, 좀 더 정리해서 말해줄 수 없을까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 말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도 많이 봐서 각 동료들의 이 표정을 개인 별로 떠올릴 수 있다, 하하. 이 것들은 검사 전에 전혀 인지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반복되자 스트레스는 커지고 내가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미안함이 찾아왔다. 어느 시점이 지나자 말을 횡설수설하면 "아 저는 왜 이렇게 말을 못 할까요"라고 자조적인 말을 내뱉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하는 미안함의 표시이자, 나의 자기 방어적인 사과의 모양새였다.


내 증상들을 날 것으로 마주하자 불안도가 높아졌다. 원래는 많은 사람(약 5명 이상) 앞에서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순간에 불안이 찾아왔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불특정다수가 많은 장소(지하철, 출근길 좁은 골목 등)에 가면, 마주 오는 사람이 품 속에서 칼을 꺼내 나를 찌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반복적으로 특정인을 주목하며 나를 긴장 상태에 몰아넣었고, 그 사람이 무사히 지나가면 다른 사람을 주시하며 다시 긴장 상태에 빠졌다.


이제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업무나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으면 약물 치료는 필요하지 않아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큰 문제는 없어요"라고 대답하고 되돌아온 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6개월을 버틴 뒤, 나는 다시 제 발로 병원에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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