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용서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하게 되기까지 정말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갓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고, 갑작스럽게 넓어져 버린 것만 같은 세상에 두려움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나의 주변엔, 괜찮아, 처음엔 당연히 혼란스러운 거야. 그럴 수밖에 없어. 서서히 더 괜찮아질 거야. 네 마음이 성장해나가고 있어서 그럴 뿐이야,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어떤 선택에도 너는 결국 잘 헤쳐 나갈 거야라고 말해주는, ‘굿윌헌팅’의 숀 같은 따뜻한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우는 행동이 극에 달해 있었고, 페르소나가 팽창하여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대학교 상담소를 찾아가 힘들다고 느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놓았다. 나의 이야기를 들었던 상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뜻밖에도 이런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이러는 거겠네요, 지금은 이러는 게 아니죠?”
네?라고 말하며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 갑자기 그 상담 선생님은 영상 하나를 보여주며 내게 말했다.
“결국엔 용서해야 해요. 저도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용서하고 나아졌어요. 이 영상을 한 번 봐보세요.”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예요, 당신이 뭔데 나에게 용서에 대해 강요를 합니까?
그 당시의 내가 마음속으로 품었던 감정을 그대로 말로 내뱉었다면 아마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이렇게 말하겠지.
“선생님,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상담학 공부를 하셨으니까 적용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저는 용서를 그런 식으로 빠르게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께는 그 방법이 옳았을지 몰라도, 내담자 입장인 저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나의 마음을 스스로 돌아볼 여유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저 평소처럼 겉으로 활짝 웃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드리며 상담실을 나왔을 뿐이었다.
상담이 끝난 후, 나는 다시는 그곳을 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상담 선생님과 대학 축제 거리나 공부를 하고 있는 카페에서 몇 번 더 마주쳤다. 카페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해부학을 펼쳐놓고 멍하니 앉아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상당히 많은 양의 사탕들을 건네주셨고, 그 부분은 참 감사했지만
나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용서에 관하여서는, 선생님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생각은 내게 있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혹시나 내가 착각한 것인가 싶어서, 나중에 편지 형식의 답장 글을 쓰고 계시는 작가님이시자, 심리상담을 공부하셨으며 글쓰기 카페를 운영하고 계시는 작가님께 간략히 말씀드리고 여쭈어보았으나 역시 대학교 상담시설이 허술하다고 말씀하셨고,
나중에 찾아가게 된 정신과 선생님도 ‘용서’의 ‘용’자도 꺼내지 않으시며 그저 내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는 표정으로 들어주실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유독,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용서를 강요하는 경향이 심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의 현주소를 비판하라 한다면,
청년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가질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다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세대, 즉 윗세대는, ‘빠르기’에 집중하여 기적적으로 단시간 내에 한국을 회복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여 결국 대한민국의 성장을 도모하는 쾌거를 이룩해 내었으나
너무 ‘빠르기’에만 집중한 탓에, OECD 기준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 또한 만들어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전에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고 남과 철저히 비교하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너무나도 미운 감정이 들었을 때, 억지로 용서하라 말하고 싶지 않다.
대신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다독여주라고 말하고 싶다.
꽃이 개화하기 전, 봉오리가 지는 시기가 있다.
그게 지금, 마음이 아픈 당신이 인생에서 겪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날이 풀렸을 때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찾아와 주는 것이지, 내가 억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될 감정이 아니다.
용서하기보다는,
나는 먼저 당신이 가장 즐겁게 느끼는 일을 찾아 그 속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행복하게 헤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만약 당신이 용서하고 싶다면,
당신이 용서라는 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마음에 있어야 한다.
결국엔, 용서를 하기 위해 아등바등 억지로 노력하고 애쓰기보다는, 당신의 마음 밭을 먼저 넓히고 기름지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넓어지고 여유로운 마음은, 곧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날씨가 쌀쌀한 계절이지만, 나는 어디선가 깊숙한 곳 아래에서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자주 상상하곤 한다.
어디선가 벚꽃 향이 난다,
살랑이는 바람을 상상할 수 없는 차디찬 계절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봄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머지않아, 곧 얼어붙은 당신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시기가 찾아와 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