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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온유 Jun 01. 2023

기대 중이야

토막 에세이-사랑

수백 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사랑하는 걸 상상하면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막힌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기대 중이야.


노희경 작가가 극본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속 여주인공 지해수의 명대사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보고 나면 수작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지는 작품이다. 작가는 보통의 드라마가 다루지 않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병을 극 중 인물들을 통해 낱낱이 파헤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작가가 보는 세상은 환상 속의 왕자와 공주가 어디 행복한 섬나라에서 꿈만 같은 사랑에 빠지는 그런 세상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잘 나가는 스타 작가이지만 사실 조현병을 앓고 있으며, 유년 시절 내내 진행되었던 부친의 폭력으로 마음이 문드러져 있는 남주인공 장재열(배우 조인성분)과 젊은 시절의 어머니로부터 심한 상처를 받고 사랑의 단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정신과 의사 지해수(배우 공효진분)의 사랑을 바라보다 보면, 사실 사랑은 완벽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날카로운 파편 같은 상처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에게 그 파편이 어느 정도 튈 것을 알면서도 다독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애초에 나부터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어디서 본 말처럼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일찍 깨달을수록 더 일찍 행복할 수 있다.


얼마 전엔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듯한 느낌이 드는 영상을 봤다.

연애든 결혼이든 결국엔 ‘나’라는 존재와 친해져야 가능한 거라며, 사랑을 하다가도 틀어지고 평생 가약을 맺고서도 이혼하게 되는 이유는 결국 한쪽이 어느 한쪽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부족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며. 영상 속 어느 강사는 열띤 표정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맞는 말이었고, 영상을 본 후 나는 찬찬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들을 곱씹으며 현대사회가, 참 딱하다는 생각을 했다.

노동 후엔 노동을 한 그대로 대가를 돌려받고, 대학을 나오면 웬만한 직장에는 취직할 수 있던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그 시대에 머물러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을 둘러싼 환경의 속도는 점차 빨라져 사람이 사람을 다그치고 사람이 사람을 벼랑 아래로 밀어내는 현상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압박. 이 두 가지가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게 되면서 사회는 현대인들에게 점점 더 완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마음속은 점점 더 황량해지기 시작했다. 강박은 그곳에서 시작되었고 사랑에 무수히 많은 조건이 붙기 시작했다.


현대인은 금지당하는 것들이, 정해진 것들이 많다, 예식의 형태만 봐도 그렇다. 굳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찬 예식장에서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걸까? 영화 서약처럼 친구들끼리 모여 아담하게 하는 결혼식이라거나, 어바웃 타임처럼 편안하게 야외에서 올리는 결혼식 같은 건 결혼식 축에도 못 끼는 걸까. 사람이 사람을 너무도 사랑해서, 평생을 서로만 바라보고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것인데, 과연 형식이 얼마나 중요할까.

이 사회에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는 맞춰 살아가야 하긴 하겠으나, 나는 굳이 제도나 틀, 관습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이 걷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미소 짓는 늘 네모난 한국 사람들에게 나는 꽤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관계를 맺을수록 외로워진다면, 그것은 당신이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보다 틀에 맞추어 대해야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곁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이 되고, 원치 않든 원하든 사회생활을 계속해서 해나가야 한다면 결국엔 곁에 지속적으로 편안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나만의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일들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편안한 누군가를 가까이할 수 있는 일, 그것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만약 나에게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품을 내어줄 테다. 아주 작디작은 품이어도 상관없다. 나의 품이 그에게 안식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힘든 일을 마치고 나를 마주하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아기 새처럼 짹짹대며 따스한 햇살이 환하게 비추이듯이 있는 힘껏 그에게 미소를 지을 테다.


아주 유치해질 테다. 아니, 아예 청개구리가 될 테다. 그의 손을 잡고 겨울엔 아이스크림을, 여름엔 따뜻한 국물 가득한 음식을 먹을 테다.

때론 펑펑 눈물 흘릴 테다. 그것이 그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타인에 의한 것이든, 결국엔 하루면 다 풀어버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떡볶이를 먹겠지.

그렇게 일상에서 몇 번의 계절이 반복되고 나면, 결국 서로가 서로의 세세한 면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만큼 스며들어 함께 맞잡은 두 손을 어느새 빼려야 뺄 수 없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날에, 나의 모난 곳들은 점점 굴렁쇠만큼이나 둥글어져 나는 세상을 힘차게 굴러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굴러가게 될 삶이라면, 나는 기왕이면 삐죽 솟은 곳 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며 길을 깨끗하게 닦아내는 굴렁쇠가 되고 싶다.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 새해가 다가와 앞자리 수가 바뀐다 해도, 그 나이대에 겪는 고민이 새롭게 생기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민을 해보아도 문제들은 항상 생겨난다면, 파도를 타듯이 삶을 살고, 여행을 떠나는 마음가짐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대해보는 것이 좋겠다. 마음에 들면 그 나라에 가 장기적으로 체류하거나 살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못 견딜 만큼 아름답다면 그의 마음속에 아예 눌러앉아 합법적으로 오랫동안 체류해 버리도록 하자.


나중에 내가 오랫동안 체류하게 될 사람이, 기왕이면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면, 나의 품  조각을 내어주어도 안심이 되는 선한 사람이었으면, 눈빛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기대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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