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고군분투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알바를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랐다. 대학교에 오고나서는 학교에서 학식도 제공하고, 기숙사도 제공하니, 사실 알바를 할 필요성도 없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어서, 3학년이 되면 선박 실습을 갈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사실 한국해양대학교, 목포해양대학교 친구들은 선박에 일하기 위해서 진짜 취업을 하기 전에, 선박에 대해서 미리 체험하고, 배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그리고 실습 자체를 갈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어떤 회사에 갈 것인지를 2학년 때 결정해야 한다.
우선 실습을 갈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때, 고민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론은 생각보다 명쾌하게 내렸다. 나는 어떠한 결정을 할 때, 나중에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결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실습을 다녀오게 되면, 다녀온 회사에 취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더욱 높아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녀와 본 사람만이 아는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실습에 가기로 결심했다!
일단 마음은 실습을 가기로 결심했다. 이 즈음에 학교에서 나와 같이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걱정거리들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실습을 다녀온 선배들이 자체적으로 실습 설명회 같은 것을 열어주었다. 나 역시 궁금한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습 설명회에 냉큼 참여했다.
내 고민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더 많은 걱정거리들을 안겨주었다. 그 선배들은 실습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모두 공평하게 전달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설명회를 마치고 나오는 나의 머리속에는 단점뿐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우울했다는 얘기, 선박에는 남자들만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여자분들이 살아남으려면 더욱 발버둥 쳐야한다는 얘기, 그리고 실습을 갔다가 다치고 돌아오기 쉽상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걱정을 덜기는 커녕 걱정을 한보따리 얻어왔다.
선박에 승선하러 가는 전날까지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에 선박에 올라가자마자 어떻게 인사를 해야할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말이다.
선박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가파른 사다리를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단단하게 고정 되어 있지도 않아서 내가 한발 한발 내딛을때마다 조금씩 옆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사다리 구멍 사이로 살짝씩 보이는 아래를 보다보니 정말 아찔했다. 사실 이 선박에 올라간다는 설레임과 걱정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고 너무 무섭다는 생각 뿐이 안났다.
드디어 길고 긴 사다리가 끝이 나고 꼭대기에는 미얀마 외국인 선원분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 주었다. 그때 나에게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해줬던 그분의 얼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일단 처음 일주일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일단 선박의 구조도 하나도 모르겠고, 어느 곳으로 오라고 했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도통 모르겠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겠을 무렵, 나에게도 본격적인 실습 생활이 시작되었다.
실습 항해사들은 한명의 항해사와 함께 당직을 선다. 당직이라고 하면 하루 24시간을 8시간씩 3명의 항해사가 돌아가면서 운항을 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일등 항해사님과 당직을 서게 되었다. 선교에 있는 기기들을 배우고, 선박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하나하나씩 공부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에는 아침 4시부터 8시, 저녁 4시부터 8시 이렇게 당직을 섰었는데,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선박은 밤에 밖을 잘 지켜볼 수 있도록, 내부에 어떤 불도 키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나에게 아주 잠들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기분이었다. 가끔 당직을 서다가 졸아서 일등 항해사님한테 혼나는 날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삼등 항해사님을 따라서 선박의 갑판을 돌아다니며, 여러 장비들을 관리하고 정비하는 일을 했다. 정말 다들 철인이 따로 없었다. 너무 졸리고 피곤했는데 다시 일하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일을 하다보면, 실수하는 일이 셀수 없이 많았다. 다른 분들과 무전기를 통해서 대화하곤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알아 들었었다. 일단 사용하는 용어도 생소할 뿐더러, 무전기로 내용을 듣다보니 정말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되묻는 나의 말에, 반대쪽 무전기에서는 한숨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 사회에서 일을 해보다보니, 나의 긴장도가 정말 높았던 것 같다. 단순한 일인데도 실수도 많고 그 실수에 혼나다 보니 또 기가 죽어, 평소에 잘 하던 일도 못할 떄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실수를 하고 돌아가서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빠한테 속상했다고 말도 못하고, 할머니한테 속상하다고 맛있는 저녁 만들어달라고 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힘든 일도 많은 만큼, 즐거운 일도 배로 많았던 것 같다.
일단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침 4시에 당직에 올라가서, 처음 보는 일출의 순간이 제일 좋았다. 그 망망대해에서 일출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세상에서 저 일출을 내가 제일 먼저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따듯한 믹스커피 한잔을 같이 마신다면,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미얀마 선원 분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도, 미얀마 선원분들이 한국말을 배워와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갑판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까지 마치고 마시는 맥주 한잔은 정말 최고였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직장인으로서 일을 하면서 힘든 순간을 극복해내는 방법, 그리고 작은 일로도 행복을 배로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 당시에 배우고 습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의 6개월간의 실습 생활을 마무리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습이 2주 정도 남았을 시점에, 나는 계속 달력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배에 대해서 익숙해 지기도 했고, 우리 선박이 점점 한국을 향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집에 가고 싶었다. 시간이 이렇게 멈춰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달력만 보고 있노라니 더욱 시간이 안가는 것만도 같았다. 이 시점에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나의 실습은 과연 성공적인가? 라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실습 생활을 마쳐가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정말 후회없는 시간을 보냈는가 였다. 또, 내가 정말 선박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는 한건가? 였다. 내가 이러한 생각들을 계속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런 생각은 일단 ! 집에 가서 하자 ! 였다.
이 실습 생활 당시에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 당시의 사진을 다시 본다면 그때 나의 실수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 모두 지워버렸다. 그 당시에는 나의 인생을 모두 나열해본다면, 가장 암흑기가 아닐까 싶은 때였다.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암흑기 였던 것은 맞았지만,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해도 엄청나게 힘들어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당시에 이미 나의 바닥이 어디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것이다.
지금도 개발자의 일을 하면서, 밤샘을 한다던가, 내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을 줄 때도 많다. 그럴때마다 나는 이 암흑기의 실습 항해사 시절을 떠올려보곤 한다.
지금 어떤 풍파가 오더라도 이때 만큼 힘들지는 않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