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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다서다 Feb 24. 2023

글로 웃길 수 있는 한계는?

아무리 웃긴 상황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되는 것인데 하늘이 내려준 얼굴로 천생 개그맨이 열정을 불태우며 순간의 재치까지 발휘하는 무대도 아니면서 글자의 모임이 웃겨봤자 얼마나 웃길 것인가?


가만히 보니 대부분의 문학에 웃음코드마저 감동으로 엮어가는 선입견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글이라는 것이 순간적인 재치만으로 만들어지기보다 사색과 탈고까지의 고통이 은연중 글에 겹겹이 배어드는 것이니까.


글로 독자의 배꼽을 사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지우기 힘든 얼굴분장이나 커다란 소품과 의상의 버프 없이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구르게 할 수 있다면 글의 한계를 한 차원 높은 세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읽었던 책들 중에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가의 유머가 활용되었던 부분들이 분명 꽤 있었다. 다만 눈물은 주룩주룩 잘 뽑아내는 장인도 유머러스한 문장들에서는 그 힘이 약해서 작은 웃음이나 귀엽게 여겨지는 감정들 내지 따뜻함이나 유쾌함 정도로 마무리되는 것들인데 tv를 보다가 의도치 않은 정확한 순간에 정확하게 웃음이 적중되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그 유머가 폭탄이 되어 웃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글을 읽으며 그렇게까지 웃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웃음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래서 사고의 과정을 무의미하게 한다. 


방구끼면 웃기고 방구끼다가 똥 나온 이야기는 더 웃긴데 우리 인류가 몇천 년이 지나도 이런 원초적인 코드에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보면 역시 웃음이라는 것은 본능적인 그 무엇인 것이다.


배가 아파서 식은땀을 흘리며 길거리를 헤매다 겨우 찾아 들어간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다시 나와 다른 가게의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특유의 A자 걸음모양은 왜 웃긴 것일까? 누가 봐도 그 고통을 알 수 있는데 심각한 상황이지만 웃긴 것이 아이러니하다.


더러운 주제만 웃긴 것은 아니다.


못생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면이 있다.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못생김은 개그맨의 능력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할 때가 있다. 물론 번뜩이는 재치와 적절한 언변으로 그 못생김을 금상첨화로 활용할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얼굴만으로 개그맨 시험에 합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봐서는 웃음에 충분히 플러스가 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반대로 이쁘고 잘생긴 사람일수록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같은 동성에게 그런 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이성에게는 허전한 농담도 꽤 웃기게 들리긴해서 그것도 웃긴다.


어찌 되었건 웃음은 상상력의 영역보다는 본능을 자극하는 대면의 환경이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웃고 싶다면 확실히 글만 읽는 것보다는 웹툰이나 영상 등의 이미지를 대하는 것이 적절할 듯 싶다. 


글로 웃긴다는 것은 '피식'이나 '크크크'가 한계인 것 같다.


만약 내가 생각한 것을 깰 수 있는 웃긴 글이 있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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