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등대 Jul 08. 2022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지. 쉬는 것도 배워야 해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지. 쉬는 것도 배워야 해

서로의 삶을 응원해주는 귀한 친구와 카페에서 얘기를 하다 친구가 한 말이다.

쉬는것 조차 편하게 쉬지 못하고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괴롭힌다는 내용이 얘기의 앞에 있었다.


국어사전에서 '쉰다'는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라고 적혀있다.

유년시절부터 완벽주의가 있었던 나는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에너지가 떨어지면 쉬어야 하는 게 이치인데 매 순간 전력질주로 달리길 원했다. 에너지가 떨어진 날이면 그런 나를 자책하고 못살게 굴다 하루가 지나가버리곤 했다.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갔고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충전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몸이 아프고 나서야 타협점을 찾아 쉴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은 내게 큰 이슈였다. 그래서 그런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첫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들이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쓰레기야' 같은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불안함 밑에는 죄책감이 있었다. 죄책감은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몇 년 동안 꽤 오랜 시간 관찰해왔다. 죄책감이 들 때 느껴지는 느낌을 따라 기억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보니 유년시절에 이르렀다.

그 기억은 어린 시절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충격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풀어쓰자면 어른들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프레임이 씌여진 순간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착한 아이란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가령 청소를 도와준다던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지 무언가 어른들이 요구하는 걸 해야 했다. 그것도 '잘'해야 했다. 나보다 잘하는 친구가 있다면 어른들이 그 친구를 더 칭찬했고 예뻐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조건부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사랑받기 위해 '잘'하지 못하면 안 됐다. 그게 그 시절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내가 발견한 죄책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른들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잘하지 못하면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돼버리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래서 에너지가 떨어지는 날이면 제대로 쉬지 못하고 불안함 속에서 떨며 나를 자책하곤 했던 것 같다. 


결국 죄책감은 나를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라는 내 안의 구조 요청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던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준 적이 솔직히 없다. 생산적인 일을 할 때면 그런 나를 쉽게 인정하고 기특하게 여기지만 그렇지 못한 날엔 꼴도 보기 싫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못살게 구는 걸 인지할 땐 스스로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괜찮아, 내가 나를 사랑할게. 유년시절 그토록 원했던 조건 없는 사랑을 내가 줄게. 그러니깐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자책하지 않아도 돼. 네가 원했던 만큼, 넘쳐흐르도록 내가 그 사랑을 줄게'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지, 쉬는 것도 배워야 해를 이렇게 적어보고 싶다.

나를 나로서 사랑해 준 적이 없어 미안해,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게


많이 넘어질 거다. 지금까지도 많이 넘어졌고 앞으로도 많이 넘어질 것이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는 걸 포기하진 말자고 다짐해본다.

내가 줄 수 없는 사랑은 누구에게도 구하지 못하는 법이니.



용서와 화해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다. 오늘 글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올린다.
















  


작가의 이전글 "뭐 어때! 비 좀 맞을 수 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