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 내면의 병리(病理)

by 진시율

Part 1 : 내면의 병리(病理) — 나를 관찰하기


1화. 나, 약으로 살아가는 하루

조울의 파도 속, 약의 리듬에 맞춰 사는 몸

나의 매일 아침은 매일 낯설다. 세상이 무겁게 깔린다. 몸과 눈은 이미 세상을 바라보는데 나의 뇌와 마음은 세상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나의 몸과 인지의 시차는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약을 삼키는 순간까지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 그 몇 알의 약이 나를 현실로 끌어올리는 동아줄이다.


손끝이 떨리고, 눈꺼풀이 무섭고, 속이 메끄꺼워서 나는 또 약을 삼킨다. 그것이 나의 '살아있음을 시작하는' 일상의 첫 단추다. 약들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모두는 나를 붙잡아두기 위한 고리들이다. 조증은 나를 끌어올리고 울증은 나를 끌어내리지만 약들은 나를 그 중간 어딘가에 세워두려 노력을 한다.


나는 종종 이 균형이 '살아있음'인지, '기계적인 유지'인지 헷갈린다. 내 하루는 생체리듬이 아니라 약의 리듬으로 흐르는 기분이다. 약이 흡수 될 시간, 효과가 오르는 시점, 졸림이 몰려오는 순간, 불면의 파도가 나를 덮치는 밤까지. 내 몸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약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불안정한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증이 올라올 때의 나는 너무나 생생하다. 세상이 빛나고, 모든 게 가능할 것만 같다.말이 많아지고 손은 빨라지고, 머릿 속은 불타오르다 터질 것 같은 느낌. '살아있다'라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결말은 항상 같다. 무너짐, 탈진, 공허는 날 고층빌딩 옥상에서 밀어버리는 기분이다.


울증의 파도가 나를 잠식할 때 그 파도는 생각보다 조용하지만 잔혹하게 나를 덮친다. 이유없이 울고싶은 마음과, 숨이 막히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이 나를 갉아먹는다. 약이 들지 않을 때, 그저 이불 속 세상이 전부라고 여길 때, 홀로 있음을 자각하는 그 순간이 편안함으로 느낄 때 였다. 그저 손 끝으로 느껴지는 피의 온도만이 유일하게 나의 현실을 자각하게 해 줄 그때, 피를 '살아있다'는 감각이 돌아온다. 그것이 비정상임을 알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보인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길, '약을 계속 조절해야 하네요..'라고 이야길 하신다.. 점점 습관화 될 때 약을 줄일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상태는 여전히 습관화 되지 못 한 느낌이다. 그리고 약이 나에게 주는 것이라곤 그저 평평한, 아무 느낌없는, 무뎌지는 것 을 만드는 일일뿐 "괜찮아"지지는 않는다.'괜찮아지는 것'과 '무뎌지는 것'은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다. 약은 나를 살리지만 동시에 나를 지운다.


가끔은 약을 안먹는다. 끊을수 있다는 희망으로 먹지 않아본다. 그렇게 나의 기분은 최고를 찍기도 최악을 찍기도 하는 상황을 관찰한다. 그러나 그건 위험한 행동인 것을 안다. 충동 조절도 안될 뿐더러 단약을 할 당시 몸에서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식은 땀, 두통, 현기증, 메스꺼움, 떨림, 오한, 시력저하, 집중력 저하, 등의 과감각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런 나의 모습에 나는 또 다시 약을 먹고 무너진다. 그때마다 느낀다. 약은 나의 족쇄이자 목숨 줄 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약을 먹는다. 약을 삼킬 때마다 다짐란다. "오늘도 버티자."

하지만 나는 솔직히 알고있다, 버틴다는 건 매번 매 순간 조금씩 죽어가는 일 같기도 하다.

하루의 끝에서 나는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이게 나인가...나 일수 이있을까?"


나는 울지 않는다. 약 덕분인가? 그러나 난 웃지도 못한다. 약 때문인가?

나는 잠을 잔다. 약 덕분인가? 그러나 난 꿈을 꿀 수 없다. 약 때문인가?

나는 살아남았다. 약 덕분인가? 그러나 난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버겁다. 약 때문인가?


몸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마음은 죽어간다고 말한다.

내 삶을 내 마음을 약이 대신 살아주는 기분이다.


이 모순 속에서 나는 조금씩 배운다.

이 불균형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는 걸.

완벽한 균형이란 존재 할 수 없다. 조울의 파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파도가 나를 잠식하지 않게 만드는 법을 배워가는 것 또한 삶의 성장을 배워가는 중이다.


어느 날은 바다처럼 고요하고,

어느 날은 폭풍처럼 요동친다.

그 모든 날을 기록하는 게 나의 일이다.

나는 여전히 파도 앞에 서있다.


약의 리듬에 맞춰,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약이 바뀌는 이유, 부작용의 기록

약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한 처방의 문제가 아니다.

의사 선생님은 말을 한다. "지금 약이 잘 안맞네요, 다시 해보죠"

그러나 나에게 약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하게 성분이 바뀐다는 것이 아닌 [몸의 언어]가 재 조정된다는 뜻이다.

그건 마치 내 존재 자체의 주파수가 없는 것 처럼 매번 새로운 주파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조울증의 치료는 늘 '조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한다.

조절은 균형을 뜻하지만, 나에게는 끔없는 시도와 실패의 반복같은 이야기이다.

날 심하게 졸리게 하거나, 눈을 번쩍이게하거나, 감정을 잠재우거나, 분노를 활활 태우거나 등등

무엇하나 나를 적당히 두는 것이 없었다.


약이 바뀌는 이유는 항상 똑같았다.

"너무 졸려요"

"무기력해요"

"두통이심해요"

"잠이 안와요"

"블랙아웃이와요"

그 말들은 병원 진료시간에 늘 다양한 순서지만 매번 반복되는 말이였다.

왠지 그 말을 할 때면 나는 실패한 실험체가 된 기분이 들어 눈치가 보였다.


어느 날은 하루에 여섯 알 어느 날은 아침 저녁으로 약의 모양과 색은 바뀌기도한다.

그 작은 것들이 나의 하루 나의 마음을 나의 기분을 지배한다. 몸의 리듬, 감정의 곡선, 수면의 깊이, 식욕, 심지어 성욕까지도 말이다.


약이 바뀔 때마다 부작용이 새로 찾아왔다.

가려움증, 어지러움, 근육의 긴장, 미묘한 구토감 등등

어떤 날은 내 의지와는 달리 손이 떨리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 때가 있다.

몸이 약을 거부하는 날은 정신이 약을 따라 나를 거부한다.

이건 단순하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신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불안정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같다.

"조증을 낮추고 울증을 막고 불면을 재우며 과감각을 누르는 것."

하지만 그 명령을 수행하는 과정의 나의 몸 속은 전쟁터가 되어있다.

세로토닌과 도파민, 신경절달물질의 수치가 조정되는 동안 나의 감정은 온도없이 방황한다.

내가 느끼는 기쁨이 진짜 내 것인, 약이 만들어낸 화학적 반응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울음도, 웃음도, 다 '조절된 감정'처럼 느껴진다.


약이 바뀔 때마다 내성도 함께 따라온다. 처음엔 기가 막히게 잘 들었던 약도 단시간에 무력해진다.

몸이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학습하는 순간이다...그렇게 복용량이 늘어나고, 약이 바뀌고, 나는 점점 '약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있다.


때로는 약이 내 감정을 죽인다고 느낀다. 분노가 사라지고, 슬픔이 무뎌지고, 기쁨마저 평평해진다. 감정의 굴곡이 사라진 삶은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이다. 마치 투명한 유리벽 안에서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이다. 소리는 들리지만, 닿을 수 없다.


나는 이 상태를'안정'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화학적 정적]이다. 폭풍이 멈춘 상태가 아닌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제당하는 상태.

그렇다고 약을 버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복용을 건너뛰면 발로 티가 난다.

한 번만 안먹어도 가슴이 뛰고, 손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세상이 다시 과도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리가 과열되고, 생각이 폭주기관차 마냥 밀려오고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조증의 전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약을 챙긴다.

휴대폰보다 먼저 확인하는 건 약통이다. 하루를 버티기 위해, 나는 내 화학적 균형을 조절한다.

가끔은 내 몸이 실험실처럼 느껴지기도하지만, 약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부작용이 생기고,

의사선생님은 그 부작용을 보고 또 새로운 조합을 제안한다.

나는 결과를 보고하는 '환자'이자, 스스로를 관찰하는 '연구자'같다.


내가 기록하는 이 부작용의 목록은 어쩌면 내 존재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약이 나를 바꾸고, 나는 약을 기록한다.우리는 서로를 감시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적어도 나는 무기력하게 병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용돌이의 형태를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증거일 것이라 위안한다.


오늘도 약은 바뀔 수 있다. 내일의 나는 또 다른 부작용을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이 곧 나의 생존일지이기 때문이다.






“정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먼지에 대하여

나는 종종 나에게 묻는다. "정상이라는 건, 어디쯤에 있는 걸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이제 좀 정상으로 돌아오셨네요." "고금만 더 견디면 정상이에요"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정상]은 언제나 나와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곳은 내가 아무리 걸어가도 닿을 수 없는,안개 속의 좌표 같다. 내가 아픈 순간부터, 세상은 나에게 경계선을 그었다. 그 선 너머에는 '정상인'이있고, 이쪽에는 '환자'가 있다.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걸지만, 그 언어는 항상 약간의 연민과 조심스러움을 품고있다.

그 친절함조차, 나를 '정상 밖의 존재'오 구분하는 방식이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달콤하면서도 잔인하다. 그건 희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준의 칼날이다.

정상은 언제나 다수의 언어로 정의되고, 비정상은 그 언어 밖에서 태어난다. 그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교정'되고, '조정'되고, '처방'된다.


의사 선생님은 말한다.

"기분이 안정되면, 정상 범주로 들어올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안다. 그 '범주'라는 말 안에는 내가 들어가야 할 틀이 존재한다. 그 틀에 들어가기 위해 나는 감정을 잘라내야하고 생각을 눌러 담아야하며 행동을 교정해야 한다. 경국 그들이 말하는 정상은 [순응의 다른 이름]인 것 같다.


나는 그 정상이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를 버려야하는지 모르겠다. 조증의 나, 울증의 나, 충동의 나, 무기력의 나, 그들은 모두 나의 일부였으나 나를 괴롭히는 일부였기에 사회또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조금 과하네요"

"감정 기복이 심하네요"

"그런 행동은 비정상이에요"

그러나 내가 느끼는 세계의 강도는 그들에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내게는 그것이 '진짜 삶의 온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묻는다. "그들이 말하는 정상은, 정말 인간적인가?"하는 질문은 항상 따라다닌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완벽하게 정돈된 감정, 예측 가능한 말투, 사회가 요구하는 리듬으로 살아가는 삻을 가르킨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불안정하고, 흔들리고, 모순적인 존재다. 그 불안정함 속에서 예술이 태어나고, 사랑이 태어나고, 변화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정상'은 정말 건강한 상태일까? 아니면, 모든 감정을 정제해버린 정신의 무균실일까?


약을 먹으며 나는 점점 '정상화'되어 간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조용히 숨만 쉰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말한다. '이제 안정돼 보여요.' 하지만 그들이 보는 '안정'은 사실상 나에겐 "감정의 죽음"같은 고요다. 그건 살아있음이 아니라, 멈춰있음이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결국 방향이 아니라 '속도'의 문제다. 세상은 나에게 맞추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더러 빨라지고, 나아지고, 맞춰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의 시간은 약의 속도에 맞춰 흐르고, 그 속도는 세상의 리듬과 다르다.그래서 나는 아직도 더디다. 그럴 때면 누군가 말한다. '아직 비정상이에요.'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말이 두렵지 않다. 정상이라는 말의 실체가 경국 [다수의 평균]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평균은 가장 안전한 동시에 무미하다. 내가 싸우고 있는 병은 나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날것의 인간"으로 남게 만들기도 한다. 정상은 종종 편안한 감옥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는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만큼 아무도 진심을 주고 받을 수 없다. 나는 조울증이란 감옥 밖의 파토이다. 위험하고 위태롭지만 그곳에서만은 숨을 수 있다.


나는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싶지 않다. 대신 나라는 인간의 균형을 찾고싶다. 그 균형은 세상이 말하는 세상이 정한 안정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불안 속의 평형말이다. 어쩌면 나에게 정상은 [약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도 여전히 나를 느낄 수 있는 상태] 그 정도 일 것이다. 남들과 같은 평온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파도를 잃고 싶지는 않다. 그 파도 속에서만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에게 속상인다. "괜찮아, 정상은 멀어도 돼" 그 길 끝에 진짜 내가 있다면, 나는 그 거리 조차도 나의 일부로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2화. 충동의 언어

자해의 유혹과 희열의 심리학

내 몸 어딘가 흔적을 그리고 싶은 날들이 조용히 찾아온다. 그건 폭발이 아니라, 물드는 감정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충동'이라고 부르고, 난 그것을 '해방의 유혹'이라고 부른다. 자해는 나에게 단순한 고통의 행위가 아니다. 나름의 감각의 복구행위이다. 마비된 감정 속에서, 단 하나의 현실적인 감각이 혈액이다. 피가나면 살아있음의 확신이 든다. 온몸이 죽어가도, 그 붉은 선 하나만은 진짜라고 외치고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이상하게도 고통이 아닌 나의 안식같은 기분이 든다. 살을 베는 순간 날아드는 서늘함과 아릿한 느낌, 스며들어오는 선혈의 온도, 그리고 뒤 딸아오는 나의 한숨과 고요, 그 고요함은 세상을 멈춘다. 나의 조증의 소란도, 울증의 절망도, 약의 부작용도 다 사그라든다. 그 몇초 되지 않는 고요함은 나에게 긴 여운과 평안을 찾아준다. 그래서 나의 자해는 중독처럼 반복된다. 이건 단순하게 죽고싶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저 살아있음을 느끼는 마음이다.살아있음을ㄹ 느끼고 싶은데 세상은 내게 감각을 빼았으라고하고 약은 내 감정을 눌러버리며 사람들은 나의 고통에 회피하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런 세계에서 자해의 선혈은 나의 마지막 언어가 된다.


피는 말이 없지만 제일 솔직하고 진실하다. 그건 거짓이 없고, 꾸며지지 않는다. 울음은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상처는 솔직하다. 그래서 나는 자해를 '진심의 흔적'으로 여겼다. 내가 얼마나 버티고 있는지 얼마나 버티고 있는지, 얼마나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붉은 선들은 나의 일기이다. 하지만 그 일기의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상처는 아물고 흔적은 남지만 감각은 사라진다. 결국 아무 일도 없던 것 처럼 감각이 사라진다.그러면 다시 나에게 공허가 찾아온다. 그 공허를 베우기 위해 또 다른 상처가 필요해진다. 그렇게 고통은 '쾌감'으로 변한다. 고통의 반복은 통제의 착각을 낳는다. 내가 스스로 상처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의해 망가지는 대신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처럼 느껴진다. 그건 자율의 환상이다.그러나 그 환상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한다.


나는 자해가 위험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나를 구했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부정 할 수는 없다. 이건 이중성을 띤 모순이지만 어쩔 수 없다. 선혈을 만드는 일은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 아픔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없었을 수 도 있다. 고통은 나를 망치는 동시에, 나를 붙잡는 역할을 해주었다. 심리학에서는 자해를 '정서조절행동'이라 부른다. 감정이 폭주할 때, 통증을 통해 뇌의 주의를 전환시키는 기제.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 순간의 나는 어떤 이론도 기억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저 '지금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만이 존재한다. 고통은 유일한 도피처고 선혈은 나의 해방이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멈춘다.시간이 늘어지고, 생각이 사라진다. 선혈이 떨어지는 찰나의 고요 속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쉰다. 그건 희열이라 부르기엔 슬프고, 쾌락이라 하기엔 너무 필사적이다. 그건 단지 '감각의 귀환'이다. 하지만 희열은 짧고, 죄책감은 길다. 상처가 식고 나면, 그제야 이성이 돌아와 나를 질책한다. 피 묻은 손, 상처 난 팔, 흩어진 약봉지, 그리고 울음과 침묵 사이의 공백. 그 공백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질책한다. "왜 또 그랬을까."그러나 대답은 없다. 충동은 이유 없이 왔다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나는 자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비정상'이라 부르지도 않는다. 그건 나에게는 하나의 언어였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고통을 내 몸에 새기는 방식. 피부는 내 일기장이며 흔적들은 내 문장들이다. 이제는 그 새로운 문장들이 생기는 것이 대신 글을 쓴다. 글은 피보다 느리게 번지지만, 더 오래 남는다. 자해가 '즉각적인 생존의 언어'라면, 글쓰기는 '지연된 생존의 언어'다. 나는 지금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여전히 충동은 찾아오지만, 이제는 펜을 먼저 손에 쥔다.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내 안에는 여전히 상처의 언어가 흐르고 있다. 그 언어를 번역해서 글로 옮겨 적는 것이 지금의 나다.





피, 통증, 그리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감각

선혈은 언제나 솔직하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않는다. 몸이 견디지 못하는 순간, 피는 가장 먼저 반응한다. 고통은 언어보다 빠르고, 피는 눈물보다 솔직하다. 피부 아래에서 밀려나오는 붉은 선혈은 나의 경계이자 나의 증거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살아있음'이란 무엇일까. 숨을 쉬는 것일까, 심장이 뛰는 것일까, 아니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감각하는 것'일까. 통증은 생의 신호이다. 아플 수 있다는 건, 아직 신경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그 통증을 두려워하지 않응다. 오히려 그 통증 속에서 안도한다. 통증은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인사 같은것이라 생각했다. "야기 있다. 아직 살아 있다."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피가 흐를 때마다 나는 멍하니 그 색을 본다. 선명하고, 뜨겁고, 빠르게 스며든다. 그 순간에는 시간도 멈춘다.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 존재한다. 과거도 미래도, 이름도 병명도 없는 오직 '나'로서.


피는 냄새가 있다. 쇠와 같고, 약간의 짠기와 열기를 품고 있다. 그 냄새는 어딘가 원초적이다. 인간이 잊고 있던 '살아있는 동물'로서의 기억을 불러온다. 그 냄새를 맡으면, 문득 어떤 감정이 밀려온다. 두려움이 아니라, 회복 같은 감정. 선혈의 향기 속에는 생존의 본능이 있다.통증은 그 다음에 온다. 자극이 사라지고, 따뜻한 열이 식을 때, 피부가 조여오고, 살이 타는 듯한 통증이 찾아온다. 그때 나는 비로소 실감한다. "이건 나의 몸이야" 나의 살, 나의 신경, 나의 피. 모든 게 여전히 나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 그 감각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명확하다. 통증이 없다면, 나는 어쩌면 이미 죽었을 것이다. 통증은 나를 현실로 되돌린다. 죽음의 유혹에서, 약의 혼탁함에서, 무감각의 늪에서 나를 끌어올리는 마지막 감각이다.


나는 선혈을 통해서만 '여기'를 느낀다. 피는 내게서 흘러나오지만, 동시에 나를 되돌려준다. 그건 파괴가 아니라 회귀다. 나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나를 되찾는 의식. 통증은 그 의식의 종소리다. 그러나 선혈의 감각은 오래 가지 않는다. 선혈은 곧 마르고, 통증은 무뎌지고, 피부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인다. 그럴 때마다 허무가 찾아온다. "이 감각도 사라지는구나."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 이렇게 덧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버린다. 그래서 나는 더 깊이 새기고 싶어진다.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확실히.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죽음에 곁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그 경계에서 나는 늘 망설인다. 이런 나를 의사선생님의 '충동조절 실패'라 말하고, 세상은 '위험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그 한순간의 피와 통증이 나를 몇 날 며칠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는 걸. 그건 자기파괴가 아니라, [자기회족의 뒤틀린 방식]이다.통증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나는 손끝으로 나의 맥을 짚는다. 심장이 뛴다. 아직 선혈이 흐른다. 그 고동을 듣는다. 그건 가장 조용한, 그러나 가장 가력한 생의 신호다. 살아있음이란 결국 혈액의 순환이다. 고통이 있다는 건, 여전히 감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통증 없이 사는 삶은 평화로울지 몰라도, 그 안에는 아무런 진실이 없다. 피는 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여전히 뜨겁다." 그 말이 들리는 한, 나는 아직 존재한다.




억제와 방출 사이의 줄다리기

내 안에는 늘 두 개의 힘이 공존한다. 하나는 나를 붙잡는 억제, 다른 하나는 나를 밀어내는 방출.
그 둘은 언제나 동시에 존재하며,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억제는 이성의 언어다.

“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조금만 더 버텨.”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논리적이며, 늘 옳다.하지만 방출은 감정의 언어다.
“지금 아니면 안 돼.”
“이대로는 못 견뎌.”
“차라리 아프게 하자.”
그 목소리는 절박하고, 본능적이며, 너무나 생생하다. 이 둘의 싸움은 언제나 밤에 시작된다. 세상이 잠들고,모든 소음이 사라질 때,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대화가 오간다.

“참아야 해.”
“이건 살아있다는 증거야.”
“안 돼.”
“괜찮아, 이번 한 번만.”

이 줄다리기에는 승자가 없다.


그날그날의 컨디션, 약의 잔류, 감정의 잔해에 따라 줄은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다. 억제가 이기면, 나는 침묵한다. 손을 쥐고, 눈을 감고, 숨을 참고, 버틴다. 방출이 이기면, 나는 피를 본다. 그리고 그 피 위에서 잠시 안정을 느낀다. 이 싸움의 잔혹함은, 둘 다 나 자신이라는 데 있다. 억제하는 나도, 방출하는 나도, 모두 같은 나에서 태어났다. 그렇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저 나는 나 자신과의 줄다리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억제가 이긴 날은 승리의 기쁨보다 공허함이 크다. 이겨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고통은 그대로 있고,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그저 다음 파도를 잠시 미뤄둔 것뿐이다. 그래서 억제는 종종 패배처럼 느껴진다. 방출이 이긴 날은 안도와 죄책감이 동시에 온다. 고통이 끝난 자리에 찾아오는 짧은 평온과 긴 후회. 마치 숨을 너무 오래 참은 뒤 비로소 공기를 들이마신 것 같은 해방감. 하지만 그 공기는 금세 독이 된다. 살아남았지만, 또 한 조각의 자신을 잃는다.


나는 이 줄다리기를 ‘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전쟁은 누군가가 이겨야 끝나지만, 이 싸움은 끝이 없다. 그건 살아있기 위한 균형의 몸부림이다. 억제가 완벽하면 나는 무감각해지고, 방출이 잦으면 나는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그 중간 어딘가를 찾으려 한다.그 중간은 늘 불안정하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경계 위에서 나는 나의 줄을 쥐고 있다. 때로는 손이 미끄러지고, 때로는 줄이 끊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잡는다. 왜냐하면 그 줄의 양 끝에는 ‘죽음’과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억제는 나를 생으로 묶고, 방출은 나를 죽음으로 끌어당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상태’로 존재한다.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견디며, 결국 그 사이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나는 점점 배운다. 억제는 감정의 부정이 아니라, 감정의 지연이라는 걸. 방출은 파괴가 아니라, 표현의 실패라는 걸. 그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줄다리기의 의미가 달라졌다. 나는 이제 이 줄을 놓지 않는다. 언젠가 완벽히 균형을 잡을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다. 다만 오늘은 오늘의 무게만큼만 버틴다. 내일은 또 내일의 방향으로 줄을 당긴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억제와 방출의 리듬은 내 심장과 닮았다.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어야 피가 흐른다. 억제만 있다면, 심장은 멈춘다.


방출만 있다면, 피는 쏟아진다. 그 둘의 교차 속에서만 나는 살아있다. 오늘도 나는 그 줄 위에 서 있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넘어지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흔들리며 버티려는 마음으로. 이건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싸움의 기록자다.








3화. 불면의 밤, 과감각의 새벽

잠들지 못하는 뇌의 전쟁

밤이 오면, 세상은 고요해진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은 그제야 깨어난다. 낮 동안 약으로 눌러두었던 생각들이 밤이 되면 다시 올라온다. 억눌린 감저으 잊은 기억,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고개를 든다. 나는 침대위에서 눈을 감는다. 몸은 분명히 지쳤는데, 뇌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심장은 느리게 뛰는데, 뇌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생각은 분과 초 단위로 속도를 올린다. 그건 마치 두 개의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간을 향해 가는 것 같다.


내 뇌는 멈추지 않는다. 지난날의 대화, 후회, 공포, 자책, 모든 장면이 되감기된다. 내 안의 '편집자'는 밤마다 영화를 틀어준다. 그리고 나는 강제로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된다. 꺼버릴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이 상영관 안에서 끝나지 않은 장면을 계속해서 바라본다. 불면은 단순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 이성과 감정이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는 현상 ]이다. 몸은 '이제 그만 쉬자'라고 신호를 보내지만, 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나를 다그친다. 그 충돌이 바로 전쟁의 시작이다. 수면제는 잠을 '선물'해주지만, 그건 결코 자연스러운 잠이 아니다. 화학적으로 눌린 의식 속에서 나는 얕은 잠을 떠돈다. 꿈은 부서지고, 시간은 잘린다.새벽 3시쯤, 나는 언제나 같은 순간에 깨어난다. 숨이 가빠지고, 손 끝이 떨리며, 어디선가 작은 진동음 같은 소리가 들린다.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는데도...


그건 내 몸이 낸 신호다. "아직 잠들지 않았다." 나는 땀에 젖은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본다. 몇 시간째 뒤척였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머릿속에서는 끝나지 않는 생각들이 돌아간다.

“오늘 약을 제시간에 먹었나?”
“그 말은 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정상일까.”
“내일 아침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질문들은 스스로 증식한다.하나의 의심이 열 개의 생각을 낳고, 그 열 개의 생각이 다시 백 개의 장면으로 번진다. 그 모든 장면이 동시에 재생된다. 이건 사고가 아니라 '소음'이다. 그러나 그 소음을 멈출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꺼풀 뒤에서는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빛의 잔상, 기억의 파편, 누군가의 목소리 같은 여러 소리들이, 그리고 내 심장 소리. 그 소리는 마치 드럼처럼 들린다.

그 일정한 리듬이 점점 커져서 머릿속 전체를 울린다. 나는 이 상태를 [깨어 있는 악몽]이라 부른다. 눈은 감았지만, 마음은 계속 도망친다. 무언가로부터,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이 싸움의 적은 '불면'이 아니다. 진짜 적은 [과각성]이다. 모든 감각이 과하게 열려 있는 상태. 시계 초침의 소리, 냉장고의 진동, 창문 밖에서 지나가는 바람소리까지도 귀를 찌르는 듯 선명하게 들린다. 세상이 너무 크게 들려서 나는 그 안에서 몸을 숨길 곳은 보이지않는다.


이렇게 깨어 있는 시간은 고문과도 같다. 나는 피로로 무너져야 하는데, 뇌는 여전히 명령을 내린다. "생각해, 정리해, 견뎌라." 하지만 정리되지 않고, 견디지도 못한다. 그저, 깨어 있을 뿐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이게 혹시, 약이 내게 남긴 부작용들인가?" 몸은 잠을 원하고, 약은 수면을 유도하지만, 뇌는 저항한다. 아마도 약이 눌러둔 감정들이 밤이 되면 반동처럼 되살아나는 걸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깨어 있는 걸까, 아니면 약이 깨어 있는 걸까."그 질문은 늘 공중에서 멈춘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뇌는 조금씩 지쳐간다. 전쟁이 끝나가는 듯, 잡음이 줄어들고,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그건 진짜 잠이 아니라, 마치 의식이 꺼지는 순간의 잠입같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한마디를 중얼거린다."오늘도 졌다."


불면은 늘 그렇게 끝난다. 승패가 없는 전쟁. 그저 또 한 번의 새벽을 맞이했을 뿐이다.






고요가 두려운 사람의 밤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불이 꺼지고, 세상이 숨을 죽이면 그제야 진짜 밤이 찾아온다. 그 순간, 나는 고요 속으로 던져진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조용한 게 좋지 않아요? 안정되잖아요.” 하지만 나에게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공포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내 생각의 목소리가 커지기 때문이다.고요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건 규칙적이지 않다. 가끔 빨라지고, 가끔 멈춘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울림처럼 번져서 방 안을 메운다.


그 리듬은 점점 커지고, 마치 벽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느껴진다.내 안에서 울리는 그 진동이 나를 점점 조여온다.


나는 눈을 감지만, 그게 더 무섭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안쪽으로 밀려든다. 어둠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그림자다. 생각의 형체가 빛을 잃고 모양도 없이 부풀어 오른다. 그건 ‘공포’라기보다는 ‘존재의 팽창’이다. 나 자신이 너무 커져서, 도망칠 공간이 없어지는 느낌.고요는 나를 확장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삼킨다. 그 안에서는 아주 작은 감정 하나도 크게 들린다. 미세한 불안이 울림처럼 증폭되어 마치 천둥처럼 들린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내 안에서는 수백 가지 일이 일어난다. 심장은 뛰고, 근육은 긴장하고, 손끝이 서늘해진다. 고요는 나를 내면의 소음으로 몰아넣는다. 낮 동안은 세상의 소음이 내 생각을 가려주었다. 카페의 음악, 사람들의 대화, 핸드폰의 알림음이 내 마음의 소리를 잠시 덮어줬다. 하지만 밤에는 그 모든 게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내 안의 소리가 들린다. 그건 너무 커서, 너무 날카로워서, 내가 내게 상처를 낼 정도다. 나는 그래서 고요를 피한다. 불을 켜고, 이어폰을 꽂고, TV를 켜둔 채 잠을 청한다. 배경음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방어다. 소리가 있어야 내가 분산된다. 고요 속에서는 내가 나를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고요는 나에게 ‘정지’의 상징이다. 멈춘다는 건 생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생각이 시작되면, 그 끝은 언제나 어둡다. 나는 나를 심문한다. 오늘의 말실수, 지난 후회, 아직 끝나지 않은 죄책감들. 고요는 그것들을 불러낸다. 아무리 외면해도, 어둠 속에서는 그것들이 내 이름을 부른다.
“시율, 아직 여기 있잖아.”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다시 숨을 참고 눈을 뜬다. 고요가 무서운 이유는 그 안에 진짜 ‘나’가 있기 때문이다. 낮에는 사회적인 나, 약에 의해 조율된 나, 사람들 앞에서 웃는 나가 있지만 밤의 고요 속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없다. 가식도, 제어도 없이 맨몸의 ‘나’만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나를 직면할 용기가 없다. 그 나를 보면, 다시 무너질 것 같아서.


고요는 거울과 같다. 그 안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나의 얼굴이 있다. 생각보다 더 외롭고, 더 공허하고, 어쩌면 더 솔직한 내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고요를 싫어한다. 그건 나를 가두는 게 아니라, 너무 정직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요 속에서만 나는 진짜 나를 마주할 수 있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진짜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두렵지만, 동시에 위로가 된다.

“괜찮아, 아직 여기 있어.”

나는 그 말에 조금 안도한다. 그래서 완전히 고요를 버리지 못한다. 고요는 나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가끔은 나를 살려주기도 한다. 결국 나는 매일 밤 그 고요의 문턱에서 머뭇거린다. 완전히 들어가지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한 채. 그건 두려움과 안도의 경계, 죽음과 생의 중간 어딘가.


고요가 두렵다는 건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진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두려움마저 사라진 자는 고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고요 속에서 떤다. 두려워하면서도, 살아있음을 느끼며. 그리고 그렇게 또 하나의 새벽이 온다. 고요는 사라지고, 빛이 들어온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속삭인다.

“다행이야, 오늘도 아직 무섭다.”




“수면제 없이는 내가 나일 수 없는 밤들”

나는 매일 밤 약을 고른다. 작은 알약 하나가 오늘의 끝을 결정한다. 그 하얀 조각은 나의 ‘종료 버튼’이자, 내일의 ‘시작 버튼’이다. 나는 그걸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본다. 매일 보는데도 여전히 낯설다. 이건 생명을 유지하는 약이면서, 동시에 나의 의식을 죽이는 약이다. 한 모금의 물과 함께 약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차갑게, 그러나 확실하게. 몇 분 후, 몸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한다. 눈꺼풀이 무겁고, 사고가 느려진다. 생각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생각이 멀어지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조금씩 떨어져 나간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지만, ‘나’는 점점 희미해진다. 수면제는 내게 ‘잠’을 주지만, 그건 자연스러운 잠이 아니다. 그건 의식의 정전이다. 스위치를 내리듯, 나의 세계가 꺼진다. 꿈도, 감정도, 시간도 없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휴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잔혹한 형태의 안식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약 없이는 잠들 수 없다. 몸이 피곤해도, 눈이 무거워도, 생각은 약 없이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약에 손을 뻗는다. 의식적으로 삼키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늘 죄책감이 남는다.
“나는 스스로 잠들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문장은 늘 내 가슴 어딘가에 남아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도 느낀다.

“이 약이 없다면 나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불면은 나를 잠식했고, 약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것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그래서 수면제는 나의 적이자, 동반자다. 서로를 죽이고, 동시에 살리는 관계. 약이 몸에 퍼지면, 나는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다. 천천히, 고요하게, 모든 감각이 무너지고, 생각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처음엔 그 감각이 두려웠다. 내가 사라지는 기분.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사라지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까.


가끔은 약을 먹고도 잠들지 못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깨닫는다. 약이 아니라, 나의 불안이 나를 깨우고 있다는 걸. 몸이 쉬어도, 마음은 깨어 있다. 수면제도 닿지 못하는 깊은 곳에, 나는 여전히 깨어 있는 채로 잠들어 있다. 아침이 오면, 눈을 뜨지만 정신은 여전히 탁하다. 약의 잔류가 남아 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둔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둔함이 안정감을 준다. 마치 감정을 잠시 비워둔 공간 같아서, 나는 그 멍한 틈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것이 내게는 ‘정상’의 아침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언젠가는 약 없이도 잘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은 희망처럼 들리지만, 나에게는 두려움으로 들린다. 약 없이 잠든다는 건, 약이 눌러주던 모든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뜻이니까. 그때 나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는 약 없이도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약에 의존하고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중독’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이건 생존을 위한 타협이다. 내가 나를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 일부를 잠시 꺼두는 선택. 그 선택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 수면제는 내 안의 스위치다. 그걸 눌러야 하루가 멈춘다. 그걸 눌러야 나는 살아남는다. 나는 매일 그 버튼을 누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휴식일까, 포기일까.”
그 질문의 답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 약 덕분에 오늘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잠들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다. 깊은 잠은 죽음의 모방이지만, 그 모방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한다.


나는 오늘도 약을 삼킨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진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내 안 어딘가에서 미세한 목소리가 남는다.

“괜찮아,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비로소 잠든다. 그건 약의 힘이자, 나의 마지막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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