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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샤 pacha Mar 07. 2022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3

주로 라디오를 통해 에프엠에서 디제이가 들려주는 노래를 통해 음악을 접하던 시절이다. 중학생 때 영어 실력이 변변찮아 노래 제목을 듣고 내가 아는 단어들을 얼기설기 조합해 적곤 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디 블루스의 “For my lady”. lady란 단어와 ready 사이에서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 노래 제목은 그나마 나았지만 고유명사인 가수나 밴드의 이름을 받아 적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중학교 때 우표가 부착된 관제엽서 뒷면에 신청곡과 함께 사연을 적어 대구 FM의 저녁 프로그램에 보냈는데 우연히 두 번씩 채택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내 짝이던 재윤은 팝송을 나 만큼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녀석은 내 등을 드럼 치듯 두드리며 엘턴 존이나 비지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Saturday night’s fever, The Boxer… 국어 시간에 일어서서 책 읽을 용기도 없던 나와는 달리 재윤은 아주 활달한 성격이었다. 저음에 성량이 풍부하지 않았지만 녀석의 가창력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 주변 셋째에서 넷째 줄에 앉는 친구들은 우리 가요를 더 좋아했다. 재윤 녀석이 좋아하는 노래는 나랑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공통되는 면도 있었다. 둘 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팬이었다. The sound of silence, Bridge over troubled water, Scarborough fair… 폴 사이먼의 시적인 가사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나름 팝송 가사를 통해 영어 실력을 향상한다는 자부심으로 우쭐대던 시절이다. 재윤은 자기 형이 전파사를 했으니 전축으로 음악을 듣고 가수, 곡명, 가사에 대한 정보가 나보다 정확했다. 그래서 팝송 가사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재미 삼아 둘이서 한국 가요 제목을 의기양양해서 영어로 옮겨 보았다. 이제 중학교 때에 비해 영어 실력이 훨씬 좋아져서 팝송 가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까다로운 관계대명사 용법에 골머리를 앓던 시절, 사랑 타령의 간결한 가사 해독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라디오에서 카세트 달린 라디오를 가진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에프엠에서 나오는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 정말 뿌듯했다. 카세트테이프로 좋아하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보통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듣곤 했다. 제목을 익히고 멜로디에 익숙해지면 녹음된 순서까지 다 기억하게 된다. 페티 페이지, 클리프 리처드, 존 덴버, 비틀즈, 비지스, 아바, 사이먼 앤 가펑클… 한 면이 끝나면 뒷면을 듣기 위해 카세트를 돌려 끼웠다. 언제부터인가 자동으로 바뀌는 기능이 생겼지만 그 전엔 그랬다. 카세트 헤드 부분에 테이프가 먹혀 들어가는 날이면, 조심조심 빼내어 감고 한두 번 빠르게 공회전을 시켜 원상태로 되돌린다고 꽤 애먹었다.


난 한 때 디제이가 될 꿈을 품은 적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도 실컷 듣고 듣는 이한테 즐거움을 주는 직업. 괜찮을 듯했다. 고등학교 교문 앞 길에서 집으로 가는 16번 버스 타러 가는 길에 있던 [54 레코드점]을 자주 들렀다. 아직도 상호가 머리에 맴도는 것을 보면 음악하고 얽힌 기억은 참 오래간다. 이 레코드점의 상호를 딴 얼치기 글을 쓰기도 했다. 대학 들어가 대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때면 음악 감상실을 약속 장소로 이용하였다. [행복의 섬]에서 처음 레이저 디스크를 통해 대형 화면으로 뮤직 비디오를 보았다.


요즘은 유튜브에 들어가면 웬만한 노래를 다 들어볼 수 있다. 이름이나 목소리만 알던 가수나 연주자의 얼굴을 그것도 전성기의 모습을 보며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것도 다양한 버전으로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목소리만 듣다가 화면을 보며 음악을 듣는 것은 참 장점이 많다. 특히 실황 뮤직 비디오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렇지만 목소리만 들으며 상상하는 것은 줄어든다. 이미지의 강렬함이 소리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이젠 음악을 듣는 것보다 보는 게 중요해졌다. 그만큼 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 소리라는 것도 효과음 처리가 많다. 실황이라고 해도 립싱크가 대부분이다.


최근에서야 처음 유튜브를 통해 매리 홉킨의 실물을 보았다. "비온다 에 그라쏘타 bionda e grassota". 금발에 통통한 티치아노의 르네상스풍 미녀를 떠올림직했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전시실에서 티치아노의 [거울 보는 여자]를 보라. 매리 홉킨은 광대뼈가 보일락 말락 하고 볼이 통통하며 약간 각진 둥근 얼굴이다. 윤기 나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늘씬하며 건강미가 넘친다. 덧니도 매력적이다. 소프라노인 그녀의 목소리는 소녀풍에 참 맑은 음색이다. 역시 소녀풍인 프랑스 갈 같은 윤기 넘치고 통통 튀는 음성이 아니라 단아하고 청아한 목소리다. 포크송 가수 조안 바에즈의 음색과도 닮았다. 그런 음색이라면 나나 무스쿠리도 있다. 무공해 천연 사이다 같은 음성인 셈. 청아하며 맑고 고운 박인희의 목소리도 비슷한 음색이다. 마이크 올드필드의 Moonlight shadow, To France, Foreign affair를 부른 매기 레일리(Maggie Reilly) 역시 맑고 세련된 음성이다.


한편, 카펜터스의 카렌의 목소리는 융단 결보다 더 곱고 매끈하며 모성애를 자극한다. 특히 저음부에서 솜사탕처럼 그렇게 풍성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익히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음에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게 올라간다. 카펜터스 그룹에서 카렌의 목소리를 빼면 뭐가 남을까? 모든 게 그녀의 목소리를 위한 들러리란 생각이 앞선다. 그만큼 카렌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독보적인 음성이다. 언젠가 커피 광고에서 본 크림과 향이 퍼져나가는 그래픽을 연상케 하는 그런 목소리다. 오랜만에 카펜터스의 노래를 듣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Top of the world, Superstar, Only yesterday, Rainy days and mondays… 한데 나보다 열 살 위인 작은 형 세대가 즐겨 듣던 포크송들이다.


긴 곡은 일단 집중해서 듣기가 쉽지 않다. 비틀즈의 경우 대부분 곡이 길지 않다. 기껏 Hey Jude, I want you(She’s so heavy), A day in the life,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정도가 긴 축에 속한다. 대중음악의 길이는 3 분 30 초를 넘지 않는 게 좋다. 관심을 사로잡아 지루하지 않을 가장 적당한 길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처음의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다. 템포가 빠르면서 비트가 강한 비틀즈의 노래가 짧은 점이 분명 성공을 거둔 열쇠 가운데 하나다. 실제 비틀즈의 노래는 2분 30초를 넘는 곡이 많지 않다. 음악성이 높은 그룹일수록 긴 곡들이 많고 노래에 비해 연주 비중이 크다. 디퍼플, 산타나,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레인보우의 경우 긴 곡들이 많다. 게다가 연주 부분이 노래에 비해 긴 편이다. 멜로디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곡이 많다.


나는 목소리에 퍽 민감한 편이다. 어떤 사람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익숙해진다. 호감형이 아니어도 조금씩 거부감이 사라진다. 그런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는 참 참기 힘들다. 희한하게 목소리가 좋은 사람한테 쉽게 매료당한다. 그 목소리가 톤이나 뉘앙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교양도 다 묻어 나온다. 요즘 음악을 들을 때 가수의 목소리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된다. 목소리보다 더 훌륭한 악기가 달리 있으랴. 고전 음악도 오페라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은 연주보다 가수의 가창력에 치우쳐 듣는다. 


샤우트 창법으로 이름을 날리는 헤비메탈 가수들도 발라드풍으로 부를 때는 곱고 섬세한 목소리가 돋보인다. 로버트 플랜트, 믹 재거, 이얀 길런, 클라우스 마이네… 밴드의 반주를 완전히 압도하는 멜랑콜리 하면서도 강렬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이 압권이다. 흑인 가수가 끈적끈적한 점액성의 목소리로 부르는 소울이나 블루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와인하우스의 노래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가창력을 따로 치더라도 목소리 자체가 가진 매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매리 홉킨, 카렌 카펜터, 존 레논, 로버트 플랜트, 켄 헨슬리, 클라우스 마이네… 


아무리 노래를 잘하더라도 목소리 자체가 주는 매력이 없으면 아무 감동이 없다. 매력적인 목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며 나아가 영혼까지 사로잡는다. 아름다운 목소리에 홀리고 나면 헤어날 길이 없다. 황홀한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홀린 사이렌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다. 리라 연주로 사이렌의 목소리를 잠재운 오르페우스는 정말 위대하다. 지옥의 신까지 감동시켜 오르페우스를 지옥에서 빼내 올 수 있게 허락받았으니… 아뿔싸! 지상으로 나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뒤돌아 보았다가 유리디체를 영원히 잃고 만다. 아마도 오르페우스는 리라 연주에 맞추어 덩달아 노래를 불렀으리라.


가렌느의 우리 집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직선거리가 백 미터 정도였다. 7층 아파트라 소리가 퍼져 올라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이 재잘대는 새된 소리가 곧잘 귀청을 울렸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종달새의 날카로운 노래처럼 들린다. 어린아이들이 내지르는 새된 소리는 중고등학생이 내는 소리보다 훨씬 높고 날카롭다. 목소리의 기가 세다고 보아야 하나. 갓난애가 우는 소리는 아파서 울지 않으면 그리 슬피 들리지 않는다. 아기의 울음은 절대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다. 울음을 통해 의사를 표현하니까.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의 목소리는 천사의 소리다. 때 묻지 않고 순수하며 해맑다. 변성기 전 소년으로 구성된 파리나무 소년 합장단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라. 청소년기가 되면 순수함은 사라지나 목소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물 오르는 봄철의 나무처럼 에너지가 넘치면서 윤기가 자르르하다. 그야말로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다. 이십 대에 이르면 젊음과 성숙함이 어울려 혈기왕성한 힘과 윤기가 조화를 이룬다. 삼십 대 중반에 접어드면 카랑카랑함이 서서히 가시면서 성숙함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흔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윤기가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한다. 오십 줄엔 무엇보다 목소리에 힘이 줄어든다. 그래도 몸의 변화에 비해 목소리의 노화는 느린 편이다. 목소리도 나이에 맞춰 늙어갈 수밖에 없다. 몸이나 얼굴이 금방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나는 대신 목소리는 그래도 비교적 젊음을 오래 간직한다.


특히 고함치듯 에너지를 한껏 써 소리를 질러대는 헤비메탈 그룹의 가수는 나이 들면 매력이 많이 떨어진다. 날카로우면서도 감미롭게 쩌렁쩌렁 울리던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가 십여 년이 지난 다음 몸짓과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나 목소리는 영 아니다.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 반면 제법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시절 못지않게 불을 내뿜듯 포효하는 디퍼플의 이얀 길런이나 레인보우의 로니 제임스 디오, 스콜피언스의 클라우스 마이네도 있다. 그렇지만 저음에서는 부드럽고 풍성하게 울려 퍼지고 고음에서는 날카롭고 박력 넘치며 호소력 강한 목소리로 팬들을 사로잡던 이얀 길런이 머리는 다 세고 근육은 쪼그라든 채 목소리는 갈라져 제대로 새어 나오지 않는 지금까지 무대를 누비는 모습은 보기에 안쓰럽다. 한편 정열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던 레인보우의 로니 제임스 디오는 아직 활동할 수 있는 67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반항기 잔뜩 밴 목소리로 고함치듯 노래하는 짐 모리슨이 칠십 대가 되어 카랑카랑함이 없어진 상태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요절했기에 거칠고 덜 가다듬어진 짐 모리슨의 음색은 늘 젊게 살아남아 있다.


요절한 유명인은 늘 젊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젊어 죽었기에 늙은 모습이 없다. 그리하여 늘 영원한 청춘으로 머문다. 일찍 죽어도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무덤으로 살아남아 팬들을 귀신처럼 사로잡는다. 스물넷 새 파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어 영원한 반항아로 남은 제임스 딘, 그를 빼다 박았으며 그 보다 더 어린 스물한 살에 뇌출혈로 숨진 한 때 비틀즈 멤버였고 촉망받는 추상화가 스튜어트 슈트클리프도 참 아까운 인재다.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대중스타, 더군다나 재능이 걸출한 팝 아티스트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죽으면 팬들한테 이를 데 없는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훌륭한 작품 활동을 펼쳤을 텐데… 활동은 둘째 치더라도 삶조차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죽은 뮤지션이 적지 않다. 


스물일곱 클럽의 유명인으로는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레드 제플린의 불후의 명곡, “Stairway to heaven”은 지미 페이지가 제니스 조플린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다.), 짐 모리슨, 쿠르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등이 있다.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존스(Brian Jones)와 유라이어 힙(Uraih Heep)의 베이스 기타리스트 개리 테인(Gary Thain) 역시 27살에 죽는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곡성으로 농촌 활동을 갔을 때 그 마을의 노총각이 스물아홉이라는데 무척 놀랐다. 어찌 저토록 나이가 많을 수 있나! 저 나이까지 살 필요가 있을까? 스무 살이던 내가 볼 때 그는 무척 늙었다고 여겼다. 카렌 카펜터스는 서른둘에 세상을 떠난다. 레개 음악의 대명사 봅 마를리는 서른여섯에 암으로 죽는다. 존 레논은 마흔에 살해되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죽은 경우도 많다.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John Bonham)은 서른둘에 알코올 과다 섭취로 죽는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카렌 카펜터스는 거식증으로 죽는다.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인기인은 그 인기를 감당하기 힘든 때가 온다. 또 인기 유지를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기가 떨어졌을 때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황을 맞는다. 


인기란 정말 대단한 것이라 무덤까지 따라간다. 파리의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에는 명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중에 파리에서 죽은 짐 모리슨의 묘지가 있다. 죽어서도 그는 팬들을 수없이 끌어모은다. 같은 동네에 이브 몽탕도 팬들을 불러 세운다.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는 공포의 저음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가 담배 바치는 팬들을 기꺼이 맞이한다. 시원시원한 목소리에 글래머의 여신 달리다의 팬들은 몽마르트르 공동묘지로 간다.


같은 간판으로 죽 몇십 년 활동한 그룹에 경의를 표하자. 비록 단원들이 들락날락하더라도 줄기차게 이어온 그룹에 큰 박수를 보내자. 십 대 말 새파랗게 젊은 시절부터 머리가 하얘지고 얼굴엔 죽음의 꽃을 피우고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뮤지션들한테 다시 한번 기립박수를 보내자.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디퍼플, 핑크 플로이드, 유라이어 힙, 스콜피언스… 멤버들의 나이가 삼십이 가까워질 무렵 해체된 비틀즈 그룹은 팬들을 위해서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칠팔 년 가까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더 이상 오를 정상이 없는 이 그룹이 내리막길만 남은 시점에서 아름다운 새 출발을 했다.


같은 노래의 서로 다른 뮤직 비디오를 보면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십 대 중반까지 비틀즈의 실황을 보면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치고 연주가 경쾌하고 흥겹다. 삼십 대가 가까워지면 음악에서 깊이와 원숙미가 느껴지지만 그 이전의 풋풋함과 신선함은 없다. 


보통 가냘프다 싶은 날씬한 몸매에 뚜렷한 얼굴 윤곽은 삼십 대에 가까워지면 누구나 서서히 선이 부드러워진다. 보통 사십이 되면 몸매에 선은 사라지고 목소리에 윤기와 더불어 카랑카랑한 맛이 가기 시작한다. 연주자로선 날엽한 몸놀림이 굼떠지긴 해도 한결 노련미를 보여주는 게 사실. 헤비메탈 가수는 시간이 주는 마모의 정도가 쉽게 눈에 띈다. 대표적인 예가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다. 볼과 턱선이 날카로운 얼굴에 풍성한 금발 곱슬머리를 흔들어대던 그는 1970년까지는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니 울림이 깊고 윤기가 자르르 하다. 그 뒤 목소리는 눈에 띄게 맛이 가기 시작한다. 1973년의 영화로 제작된 뉴욕 실황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럼에도 예전의 카랑카랑함은 많이 사라졌다. 술과 담배를 지나치게 즐긴 탓. 제법 나이 들어서도 이얀 길런, 로니 제임스 디오, 클라우스 마이네는 젊은 시절 못지않은 기염을 토해내지 않는가! 세월의 무게를 걷어버릴 순 없다고 치더라도 로버트 플랜트처럼 한 순간에 추락하지는 않는다. 


해체 직전 이십 대 말에 이른 비틀즈 멤버의 모습을 보면 벌써 세월이 느껴진다. 존보다 세 살 아래인 조지와 존과 동갑이나 동안인 링고는 나이가 덜 들어 보이는데, 존보다 한 살 아래인 폴과 존은 눈에 띄게 달라 보인다. 나이에 비해 노숙해 보이는 존의 경우가 더더욱 그렇다. 이때 비틀즈 음악은 정상에 도달한 상태였다. 제각기 결혼도 하고 명성과 부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렇지만 66년 여름 이전의 실황(1966년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Candlestick Park) 공연이 비틀즈의 마지막 라이브 콘스트이다.)에서 느껴지는 정열은 간데없고 권태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연주에 즐거움이 없다. 억지 춘향이 된 비틀즈는 이제 불화가 아니어도 존재감이 상실되었다. 바로 끝이 보인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의 상태라고나 할까. 습관적으로 만나고 사랑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 앞날이 없는… 


그룹이 해체되고 나서 각자의 창조성과 영감은 뒷걸음질 친다. 멤버 각자 앞다투어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추구한다고 솔로의 길을 가지만 넷이 함께 만들어낸 전설을 되살릴 수는 없다. 솔로 활동에서 보여준 각자의 음악은 그야말로 실망스럽다. 인도 음악에 심취해 나름 신비로움이 배어들어 깊이가 느껴지는 조지 해리슨의 경우는 따로 치더라도, 폴과 존의 경우 새로움보다는 편안함을 신선함보다는 익숙한 쪽으로 흘러간다. 비틀즈의 전설을 등에 업고 상업적으로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음악성은 떨어졌다고 보아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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