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Property Agency(우리나라로 치면 부동산중개소)에서 고객대응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 보여주고, 서류작성하고 집주인/세입자 간 연락해 주고.. 정도가 부동산 중개소의 이미지일까?
우리는 보통 1건의 계약당 1명의 로컬중개인과 한 팀이 되어 일하며 (비공식적인) 중개인 업무 외에도 N잡러인가 싶을 정도. 이삿짐센터/다산콜/통번역/비서/수리기사/청소업자/Nanny(애보기)/운전기사/택배기사/사진기사 등등 이건 좀 아니잖아.. 싶은 정도의 일도 포함 업무범주가 비교적 넓은 편이다. 물론 "로컬중개인과는 차별된 보다 나은서비스!"라는 명분하에 온갖 잡무를 추가한 보스의 취지로 그렇게 된 것 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요 업무는 집 보러 같이 가고, 서류작성/확인도 하고, 수리 업자도 불러주고, 가격이나 계약 네고하느라 중개인/집주인이랑 티격태격도 하며 "중개를 지원"하는 것이다. 로컬중개인의 경우 영어/중국어는 기본이고, 인도네시아어 나 말레이시아어등 보통 3개 국어, 나의 경우는 영어/일어/우리말이니 도합 5개 국어 정도는 커버가 가능한 팀으로 보면 된다.
며칠 전 집인도(열쇠인도- 여기서는 Handover/핸드오버)라고 부른다)가 있었다.
호텔로 픽업 가서 손님의 짐들을 같이 나르고 아침부터 힘 좀 썼으니, 이젠 검사원인 그분이 등장할 차례
유닛에 들어서기 전 초인종을 누르고(작동확인), 집안의 온갖 스위치, 가전제품을 작동시키고, 물이 끓을 시간을 대비해 가방에서 꺼낸 냄비를 인덕션에 올려놓고 작업 시작. 모든 문이며 창문은 다 열었다 닫아보고, 가전제품 작동확인도 하고, 쭈그려 앉았다 기어올랐다 하며 사진도 찍고, 리포트도 작성해야 하는 멀티플레이어모드다.
"혹시.. 이 냄비도 직접 가져오신 거예요?" 신기하다는 듯 손님이 묻는다.
"넵. 인덕션 (작동) 확인 중입니다"
간혹 손님 중엔 내가 신기한지 사진 찍고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진을 원래 이렇게 많이 찍어요?"
"나중에 나가실 때(퇴거)를 위한 증거확보해 두는 걸로 보시면 돼요. 나가실 때 진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가방안에 결함(응급처치)을 위한 장비들/ 참고로 인덕션은 전용냄비로 확인하지 않으면 작동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게 손님이 중개인(집주인 측 그리고 내 파트너)과 비품리스트(집내부의 옵션/가구나 가전제품 등)를 대조확인하는 사이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물론 집안에 결함이 많으면 많을수록 시간은 더 걸리기 마련
최근엔 디지털 버전으로 작성이 끝나면 집주인/중개인/세입자가 같이 확인하고 현장에서 바로 사인을 받아둔다
확인하면서 찍은 사진들과 결함보고서( 여기서는 컨디션 리포트라고 부른다) 위는 최근의 디지털버전, 하단 오른쪽은 과거 아날로그 버전, 스튜디오 인도에 사진만 757장이다
왜 이렇게 까지 필요한가?
소위 생활흠집, 살다 보면 생기는 자연스러운 마모/낙후 라고 하지만 그것 역시 표준이 될만한 기준은 한국에도 없다. 사람마다 판단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이곳에서도 Fair wear and Tear라는 기준이 있으나 중개인/집주인/세입자 할 것 없이 저마다의 기준은 다르다. 오히려 같은 게 없다는 편이 맞겠다. 따라서 스크래치, 얼룩, 손상 등등 처음집을 인도받을 때부터 있었다 없었다는 나중에 방을 뺄 때 '돈이 얼마가 들어갈 것인가'로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지며 위에 (다소 과한 듯한)이 모든 자료들은 매우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 기록들이 손님과 충돌을 피하는 증거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은 수리해 내라며 길길이 뛰고, 세입자는 처음에 이런 건 없었으며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애먼 사람 잡지 말라고 화살은 왜 때문인지 중개인한테 날아오기도 한다. (위의 사진에는 일부러 날짜는 지웠으나 반드시 사진에 날짜가 표시되도록 해야 한다) 중개인이 그 집에 살았던 게 아니니 그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고, 초기에 확인을 안 한 것도 아닌데 계약자가 돈을 내기 싫다는 이유로 기피하고 있으니 배 째라 같은 갈등이 생기면 위의 기록들이 이 모든 불화를 말끔하게 교통정리해 주는 것이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배 째면 제일 타격이 큰 건 세입자라는 사실
물론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싱가포르의 모든 중개인이 하지는 않는다.(많아야 몇십 장 정도이거나 Condition Report를 남기는 정도가 일반적) 사진은 커녕 비품리스트 확인하고 나면, '(입주 후) 한 달동 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한마디로 담백하게 끝나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이런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 중개인의 당연한 의무는 아니다. (그들의 업무분장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으로 어디까지나 일하는 스타일이나 호의/서비스 차원으로 도와주는 것이기에 중개수수료에 포함되는 서비스는 아니다) 집에 문제가 생겼다고 중개인의 과실이 될 수 없으며, 일부러 속이려 하거나 업무태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이니 혹시라도 진상모드 장착하시던 분들은 다시 넣어두시길.
싱가포르에서 "에이전 쓰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내지는) 써보니까 별거 없더구먼"하며 스스로 해결하려다 정보가 없어 낭패 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으니 혹시라도 향후 싱가포르에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정도로 보면 좋을 듯하다.
아래 내용들은 사전정보가 없어 여러모로 고생한 사람들의 후일담이니 살펴보면 위에 서술한 내용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물기를 머금고 울퉁불퉁해진 Parquet/Timber Floor -흔한 일이지만 Wear and Tear 에는 속하지 않는다.
내용설명이 길어진 만큼 많이 억울했던 게 너무나 느껴지는 현실조언. 그러나 정정할 부분이 있다면 5년 동안 한 번도 오븐을 사용 안 했다면 사용자과실로 인정되어 수리조항이 적용되며 우기는 것은 아니란 것
월세는 오븐만 뺀 가격을 내는 게 아니다. 엄연히 집내부에 포함이 되어있으면 '집의 일부'로서 문제가 없도록(종종 사용하는 등) 주의를 기울여 작동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관리의무라는 사실
실제 있었던 케이스로 결함이 생긴 후에 찍어놓고 사진 포토샵한 거면 어떻게 알 거냐며 억지 부리는 집주인도 있었으니, 비밀도 아닌데 고이 혼자 간직하지 말고 반드시 입주 후 한 달 이내에 중개인/집주인등 계약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결함에 대한 기록을 공유해 둘 것 (사건에 증인이 많을수록 유리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 그럼 다시 한번 복습
집 입주했을 경우 반드시 해둬야 할 것들
1. 집안의 모든 스위치, 가전제품, 수납장이나 창문, 샤워기나 화장실, 수도까지) 작동확인을 해볼 것
2. 얼룩, 금 간 것, 깨진 것, 생활흠집 등 등 눈에 띄는 곳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찍어둘 것
3. 정확한 위치, 증상, 사진이나 영상, 수리여부 등을 따로 정리해서 중개인/집주인등에게 공유할 것
4. 사진에는 반드시 날짜가 들어가도록 할 것
5. 집안내 빌트인으로 들어가 있는 가전(특히 오븐), 세탁기와 일체형인 드라이어 등은 주기적으로 사용할 것
6. 위의 모든 내용은 입주 후부터 한 달 이내에 공유할 것 (한 달 보증기간 동안의 모든 결함은 면책사유가 됨)
7. 입주당일 중개인 없이 찍은 것이라면 바로 공유할 것
다만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이 위의 기록들을 중개인이 작성해서 보내면 "중개인 찬스"가 적용된다.
즉, 그저 '쓸데없이 꼼꼼한 세입자 중개인'이 확인한 작품 정도로 넘어가지만, 중개인이 있든 없든 세입자가 직접 보내면 집주인에게 '까칠하고 피곤한(demanding 한) 세입자'로 찍힐 수 있다는 것. 계약자가 계약자에게 전달하는 것과 계약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중개인이 꼼꼼하게 한 업무의 일부는 상대 계약자가 받는 느낌이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얘기이다. (막말로 지금 싸우자는 거냐 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만약 집주인이 전 세입자의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상태라면, 보고 내용의 수리비용이 고스란히 전세입자의 보증금에서 까일 수도 있음을 의미하며, 보증금을 이미 전세입자에게 돌려준 상태라면 세세하게 찾아내지 못한 집주인 중개인 탓이 되어 (집주인 눈치를 봐야 하는) 집주인 중개인은 눈물을 머금고 사비로 일부 수리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까지 간다.
위와 같은 상황이다 보니 중개인 없다는 이유로 세입자가 직접 보낸다?!
집주인 중개인/집주인 둘 다 질색팔색 할 수 있는 셈이니 (일타 쌍피로 두 명의 적이 동시에 생길 수 있다!) 주의를 요한다는 것을 명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