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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필구 Nov 06. 2022

우리들의 일그러진 일상(4)

필구

하루 만에 평생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두 번이나 겪으니 몸도 마음도 참담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걸었다. 아니 차라리 아무 생각이 없었다면 나의 학창 시절 가장 후회되는 그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가끔 들곤 한다.

재진이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야 잠깐만 얘기 좀 하자."

"하... 야. 너 지금까지 다 봤잖아. 내가 지금 이야기할 정신으로 보이냐?"

"지금 너 혼자 가면 기분이 더 안 좋아질 거 너도 알잖아. 잠깐만 시간 좀 내라."

재진이의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그 녀석의 다 안다는 듯한 말투를 듣는 순간 머릿속 뭔가가 터진 거 같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친구를 때리고 있었다. 아까 마트 앞에서 처음 본 나를 때린 그 녀석보다 감정을 실어서 때리고 있었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아지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넘어진 친구 옆에는 비닐봉지가 널브러져 있었고, 일부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와있었다. 하늘하늘한 비닐봉지 밖에는'한국약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부는대도 얇은 비닐봉지가 날아가지 않은 건 그 안에 있던 쌍화탕으로 보이는 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쏟아진 내용 물안에는 연고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밴드도 있었다.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뭔가가 들어왔다. 친구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 나에 대한 혐오, 나를 때린 그들에 대한 분노, 허세만 가득했던 빈껍데기 같은 나의 인생,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등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한순간에 들어왔다. 한꺼번에 무거운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머릿속에서 방어기전이 발동했다.

 방어기전이 작동하자 나의 머리는 밀려들어온 생각을 단순화시키기 시작했다. 생각을 단순화시키자 결국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밖에 남지 않았다. 친구가 남겨놓은 약국 봉지를 보자 죄책감이 나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꿈틀거렸다. 또 방어기전이 작동했다. 죄책감의 대한 방어기전은 가끔 부작용을 일으킨다. 부작용에 대한 부작용은 죄책감을 일으킨 대상에게 더한 분노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 녀석은 '내가 마트 앞에서 맞는 것을 보고도 뒤에서 지켜만 봤지'와 '그래 놓고 미안하니깐 약을 사 왔구나'. 사고회로가 그렇게 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약한 인간에게 다가오는 죄책감에 대한 부작용은 위험한 것이었다.

"넌 인마.. 내가 맞는 거 보고도 그냥 뒤에서 있었지?"

내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러는 넌? 하... 아니다 그냥 가라. 그리고 내가 똑같은 잘못을 했다 해도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매 순간 계속 미안하다고만 했던 친구 녀석도 이제는 못참는겠다는 듯 가슴속의 말을 하나 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친구 팔아먹은 새X가 할 말도 아닌 거 같다."

재진이가 가슴속에 있는 말을 더 끄집어내면 말문이 막힐 거라는 두려움으로 나는 무논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래.. 더 할 말도 없다.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말하고 떠나는 그 녀석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비참해진 나 자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더 이상 녀석에게 뭘 물어보았다간 '내가 더 비참해지는 상황을 만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퇴근한 사람들의 차가 거리고 쏟아지기 시작했고, 가로등의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아졌다. 난 그들 틈 사이에 바닷물에 쓸려 다니는 미역들처럼 휩쓸려 다니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나침반을 잃었다. 피투성이가 된 옷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어두운 곳을 찾아서 다녔다. 몸속에 남아있던 분노는 어느새 사라졌고, 자기혐오 밖에 남은 건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흥분한 채 어찌 된 일 인지 물어보실 부모님께 설명해야 하는 것도, 내일 학교에 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도 너무 버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나침반을 잃은 나는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반짝거리는 등대를 발견했다. 그곳은 만화책방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렸을 적부터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래서 난 항상 가 살고 있는 그 지역 책방의 VIP 대접을 받았다. 우리와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 책방 주인 누나와도 친하게 지냈다. 책방에 도착한 나는 책을 빌려서 책방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누나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다 흠칫 놀라는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그냥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컵라면 하나와 삼각김밥 그리고 디건을 하나 가져왔다. 그녀의 배려는 아직도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지금도 난 가끔씩 내가 그 날의 그녀만큼 인격적으로 성장했을까를 생각한다. 그날 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철듦과 철들지 않음의 기준이 되었다.

"책방이 밝아서 빨간 게 너무 잘 보인다. 이걸로 대충 갈아입고, 이거 먹어. 밥도 못 먹었지?"

울면서 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난 눈물과 콧물이 섞인 라면을 입에 넣고 입을 다문채 끄억끄억하며 어린아이처럼 울어댔다.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었다.

소리를 누르며 쏟아내는 소리는 나를 더 처량하게 만들었고, 처량해진 감정은 결국 나의 입을 벌리고 말았고, 나는   크허허헝 하고 크게 울고 말았다. 덕분에 입에 물고 있던 라면은 모두 바닥에 쏟아졌다. 책을 빌리러 온 사람들이 나를 흘깃흘깃 보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나를 놓아버린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침착하던 누나는 그제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책방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내가 다 울 때까지 '조금만 작게 울어'하고 속삭이듯 말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울었어?"

"네."

난 마치 유치원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희한하게도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거 같은 착각도 들었다.

"너 얼굴부터 닦아라."

그제야 거울로 얼굴을 보았다. 옷이나 신발보다 얼굴이 훨씬 처참했다. 눈두덩이와 얼굴은 너무 부어 원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고, 머리카락은 피떡이 되어 뭉쳐있었다. 교복 안의 셔츠는 네모반듯하게 찢어져 있었다. 박자도 없이 두드려 맞았는데, 찢어진 곳은 참하게도 찢어졌구나 생각했다. 귀에는 어디서 흘렀는지 알 수 없는 피가 묻어 굳어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거울을 보며 나를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겠지만 문득 내일 학교 갈 때 입을 옷이 없단 게 떠올랐다.

누나에게 외상으로 책을 몇 권 빌리고, 집으로 급하게 갔다.

다행히 부모님은 계시지 않았다. 난 부모님이 오시기 전에 교복과 셔츠를 손빨래했다. 아무리 빨아도 피는 계속 흘러나왔다. 포기하고 그냥 말리기로 했다. 방바닥에 교복을 깔아놓고, 대충 세수만 하고 불을 껐다. 부모님께 얼굴을 들키기 싫었다. 격한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자 몸이 조금씩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일찍 침대로 갔지만 새벽까지 잠을 들지 못하고 아픈 몸을 끙끙대며 앓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학교에 갈지가 더 큰 걱정이었다.

 살면서 가장 보고 싶지 않던 아침이 밝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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