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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02. 2024

상처가 별이 되는 순간

상처가 별이 되는 시간          

  

  월초月初라 일이 많아 초밥집 모임에 약속 시간인 7시에 조금 늦었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오니 벌써 하늘이 어둑해져 있다. 먼저 온 친구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준다. 참치회에 곁들인 술 한 잔의 맛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맛은 살아가는 이야기 맛이다. 현태는 국궁을 시작한 지 십 년이 넘어섰다며 선발전에서 아깝게 3등으로 떨어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용이는 스텐드 수술 뒤에 등산을 시작했다는 것과 규칙적으로 산에 오른 덕분인지 지금은 건강해졌다고 웃는다. 정말 반질거리는 피부가 보기 좋다. 정미는 박물관에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당황했던 이야기며 새롭게 문을 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정희는 중학교에 진학한 늦둥이 아들 이야기와 명퇴하고 삼식이로 변한 남편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첫 페이지에 ‘내 오랜 벗들에게’라고 서명한 『가시는 푸름을 기워』 시조집을 건넨다. 고등학교 이후로 시조를 읽은 적이 없다는 정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시조는 어느 정도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져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건강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얼마 전 아무개 친구가 대장암이 간에 전이되었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걱정과 불안이 엄습한다. 우리도 언제든 암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술을 마신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건강하잖아, 웃으며 행복하게 살자.’ 정미의 말에 잔을 부딪친다. 우리 나이가 이제부터 아플 나이라는 둥, 건강 검진 잘 받으라는 둥, 일도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는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현태가 예전에는 시골 어르신들이 간경화로 일찍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자 문득 점방이 생각난다. 가게와 방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인 점방에서 어른들이 술을 마시면서 화투를 치고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론 화풀이도 했던 곳. 나는 내가 자랐던 남평 평산리에 있던 점방을 떠올린다. 점방 구석에는 막걸리 항아리가 있어 철홍이 엄마가 술을 팔았다. 아버지가 ‘막걸리 한 되 받아 오거라’ 하면 주전자를 들고 점방으로 달려갔다. 한 되와 반 되 단위로 팔았는데 한 되는 주전자에 가득 차게 담겼고 반 되는 절반 정도의 높이로 찰랑거렸다. 

  현태가 살았던 담양도 점방이 꽤 번성한 모양이어서 며칠 건너 술판이 벌어졌고,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니 장정들이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간경화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기계도 없이 농사를 짓던 때라 농사일이 참 고달프고 힘들어서 술이라도 한잔해야 힘이 났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비룟값도 나오지 않은 농사였다. 헛하고 분한 마음을 술 한잔으로 풀지 못하면 무엇으로 풀었겠는가.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달리 마음 붙일 데가 없으셨을 아버지도 그러셨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돌다가 다시 내 시조집에 이른다. 부럽다는 말과 대단하다는 말과 나도 쓰고 싶다는 말이 교차해서 들려온다. 너희들도 쓰면 되지, 라고 건성으로 답을 하자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돌아온다. ‘그냥 손이 쓰게 놔둬, 너무 잘 쓰려고 하지 말고’ 하려다가 그만둔다. 저마다 습(習)이 된 생각들이 있을 것이니 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시를 쓰는 너의 감성은 어디서 오냐는 정희의 질문에 나는 당황한다.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것도 운 좋게도 드들강에 인접한 마을이어서 산과 강의 정서를 한 몸에 받았다고 평소에 말은 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글쎄…, 하면서 머뭇거리는데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국환이다.     

  국환은 받아쓰기에서 처음으로 백 점을 받았다. 뭔가가 가득 차오르는 뿌듯함, 아마 희열이기도 했을 그 감정을 붙들고 국환은 집으로 달려갔던 것 같다. 평소 같으면 드들강 상보에서 놀다 가기도 했을 텐데 이날은 곧장 집으로 갔다. 칭찬을 받고 싶었다. 배추 농사를 망쳤다는 말을 잠결에 들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뭐라도 기쁨을 드릴 수 있으면 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국환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적막하고 무겁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국환을 발견한 형들이 부모님이 돈 때문에 싸우셨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형들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친구 집으로 빠져나갔다. 국환은 간간이 들려오는 어머니 울음소리로 들으며 언제 백점 맞은 시험지를 보여줄지 고민했다. 

  날은 감청색으로 어두워졌다. 엄마가 국환을 불렀다. 국환은 시험지를 주머니에 넣고 달려갔다. ‘점방에 가서 아버지를 모셔와라’ 엄마의 말은 건조했다. 점방까지는 거리가 삼백 미터 정도였는데 어둠이 드리운 길이 어린 눈에 무섭기만 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놈의 고양이, 국환은 돌을 던졌다. 괜히 심술이 났다. 

  점방에는 마을 사람들과 다른 마을에서 온 아저씨들까지 섞여 화투판을 벌였다. 군용 모포에 화투패가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방 안쪽에서 화투패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 하고 큰 목소리로 부르고 싶었지만 어른들 사이에서 주눅이 든 국환의 목소리는 모기보다 작았다. 점방에서 일보던 철홍이 엄마가 국환을 보더니, 아버지를 불렀다

 “애기가 아빠 찾아왔구만, 빨리 들어가시오.“

  아버지가 국환을 쳐다봤다. 패를 내려놓더니 점방 밖으로 국환을 데리고 나왔다. 백원 짜리 하나를 손에 들려주면서 ‘오지 마라. 다시 오면 혼날 줄 알아’ 목소리가 엄하고 차가웠다. 아버지는 점방으로 들어갔지만, 국환은 점방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무서웠다. 백 원을 쳐다보았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도 국환을 구할 수 없었다.

  다시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이 캄캄했다. 발을 내딛는 국환의 발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국환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다가 무섭고 음침한 곳에 이르러서는 달음박질해서 집에 왔다. 엄마는 다시 국환을 점방으로 보냈다. ‘아버지를 꼭 모셔와라. 안 그라면 오지 말고’ 국환은 어머니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슬프고도 매운 눈을 보고 국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점방으로 향했다.

  국환은 점방 문을 열지 못하고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다른 아저씨들 틈에 끼어 패를 돌리고 계셨다.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누구도 모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국환은 목이 잠겼다. 그렇게 국환은 밖에 서 있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집으로도 갈 수 없었다. 아버지와 같이 가야 했으므로 국환은 밖에서 기다렸다.

  담벼락에 기대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늘 맞은 백 점짜리 시험지가 만져졌다. 시험지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국환은 코를 훌쩍이며 소매로 눈을 닦고 쪼그려 앉았다. 어디로 갈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도로 위로 간간이 오가는 차들이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늘을 보았다. 길이 보이지 않은 캄캄한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국환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밤이 지나가면 다 괜찮아질 거야. 눈물이 흐르는 국환의 볼을 별들이 어루만져 주면서 오늘 맞은 백 점을 축하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국환은 별을 바라보며 자신을 다독였다. 멀리서 국환을 찾는 작은형 목소리가 들려왔다.      

  국환이는 내 아명兒名이다. 대리를 불러 집에 돌아오는 길, 밤하늘이 그때처럼 짙은 감청색이다. 그 하늘을 보며 정희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린다. ‘시의 감성은 상처가 아닐까. 상처가 상처만이 아니고 그 상처가 아름다운 별이 되었을 때 시가 되어 나를 찾아오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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