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걸이 포장
그러니까 살다 보면 , 어떤 날 어떤 시간에 어떤 음식이 탁 기억날 때가 있다.
그게 음식이라고 단어가 잘 안 붙을 때도 있는 게 , 어떤 날은 맛이 기억났다가, 어떤 날은 그 음식의 온도가 기억나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별생각 없이 구름 가는 걸 보고 있었는데 , 내 (어릴 적) 취미가 사실은 구름 흘러가는 것을 보는 것이었어.라고 와이프에게 전했는데 , 이미 그 말을 여러 번 했던 것이라 조금은 머쓱해졌을 그 타이밍에 그 구름을 즐겨보던 시절. 살았던 그 동네가 선명하게 생각나고 선선하게 그 시절 갑자기 나는 무엇을 좋아했었는가 하고 아날로그 게이지 같이 탐사등이 번쩍이는데 그때 생각난 맛이 이것이었다.
깡통분유. 빨간 통에 아기가 웃고 있는 사진. 그 깡통분유는 처음에 뜯을 때 잘 뜯어야 한다. 마치 그때 아저씨들 즐겨 피던 담배 은박지 뜯을 때처럼 잘 정렬해서 뜯지 않으면 아이를 키우는 집이 바지런하지 못하구나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맛은 서걱서걱했다. 입안에 넣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 그 숟가락으로 한 삽 담뿍 떠서 입을 크게 벌리고 한방에 탁. 입을 닫을 때 숨을 내쉬면 큰일이다. 포말 소화기 터지는 모양새가 되니까. 이렇게 먹을 때가 대부분 분유 주인의 허락 없이 먹을 때라 빠르게 한술 먹고 일단 입 다물고 골목 반쯤 벗어나면 입안에 침도 고여서 마치 시멘트 비빌 때 가운데 물 붓고 첫 삽으로 털털 털어 넣는 그런 느낌인지라. 요 고비만 넘기면 입안에서 잘 비벼진다. 이게 이빨 사이에 곤고하게 껴서 그렇게 그 달큰한 맛이 반나절은 남아 꽤나 배고플 때 요긴하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역시 숟가락으로 분유통 벽에 꾹꾹 눌러서 부서지기 좋은 벽돌처럼 숟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숟가락 앞쪽부터 긁어먹는 것. 이 경우는 내가 아기가 아닌데 숟가락을 쓸 수 있는 경우. 그러니까 분유 주인장으로부터 거의 사용 말소에 가까워진 분유통을 불하받아먹는 것인데 , 깡통을 불하받으면 좋은 점이 이 통으로 여러 가지 재 활용 재 창조 크리에이티브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말 하게는 이 통에 구슬, 딱지를 담는다. 딱지를 담으면 꾹꾹 눌러 담아도 동네 골목 왕고를 할 만큼 담을 수 있고 구슬은 다 담으면 사실 못 든다. 무거워서. 그러니 이것은 마치 아직 달성하지 못한 부의 상징 금고를 미리 세워놓고 달성하려 노력하는 수전노의 모습과 같아서 꽤나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깡통은 쥐불놀이 때 아주 히트 상품이 된다. 당시 쥐불을 던질 논 밭은 구해도 장작까지도 어떻게 구해와도 깡통 구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다. 깡통은 대부분 어른들이 다시 활용해 쓰는 경우가 많았고, 있다 하더라고 돌리기 어려운 '케첩 말통' 너무 작은 ' 후르츠 칵테일' 머 이런 것들이었는데 분유깡통은 사이즈도 좋았고 , 옆을 망치로 치면 깡통이 휘지 않고 구멍만 잘 났다. 그리고 불을 여러 번 당겨도 쉬이 검댕 타지를 않아서 아기얼굴 그을리지 않고도 잘 버텨줬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활용된 게 그즈음 국민학교에서 학교 화단 만들기가 유행이었다. 매해 유행하는 것들이 달라서 그 해에만 즐겨했던 것 같은데 , 화단을 만들고 물을 줘야 하는데 , 굳이 물 조리개를 만들어 쓰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 실과 시간에 굳이 깡통 줏어다가 물조리개 만드는 것을 했는데 , 이때도 이 깡통이 아주 유용했다.
분유를 준 옆집 새댁 아줌마는 방 안에서 귀걸이 포장일을 했는데 , 그때 우리가 그 비닐에 두 개씩 귀걸이 넣는 것을 도와줬나 봐. 그러니까 분유정도는 나눠준 것 같은데. 물론 국민학교 2학년 것들이 손을 아무리 써봐야 그거 몇 개나 하겠다고. 그냥 그때는 그래도 되는 분위기였거든. 남의 집 문간방에 저 건너편 셋방 사는 애들이 와서 밥도 좀 얻어먹고, 가끔 누워서 낮잠도 자고 가고, 그러면 우리 엄마가 반찬이라도 좀 가져다주고 그 값을 치르고.
지금 예전 사진들을 찾아보니 남양분유 맞는데 , 그때는 기업의 윤리까지 배운 국민이 없었어. 그냥 좋은 깡통에 좋은 분유 담아놓은 회사인 줄 알았지 머. 불에도 안 타고 녹도 잘 안 슬고 깡통값은 제대로 했었지.
분유맛은 어땠냐고? 위에 적었지 않은가. 달기도 달았지만 '구슬치기 맛' '딱지 맛' ' 쥐불놀이 탄맛' '화단 맛'
맛이 어디 있어. 그냥 그런 맛이지. 그냥 그 깡통 하나 생각하니 우르르 쏟아지는 비린 맛들이 이렇게 많은 것이지. 그리운 것인지 비린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 암튼 그때도 오후 네시부터 다섯 시까지는 구름이나 흐르는 것을 보고 있었으니 갑자기 생각났지. 이 정도 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