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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Dec 16. 2020

강릉 , 아무로 나미에

커피 , 그 달큰한 바람의 추억



내가 기억하는 90년대의 강릉은 고3 수능을 마치고 밤새 달려 아침에 도착하던 통일호의 기억. 그리고 달려간 경포대에서 같이 간 여자애들에게 허세를 부리려고 경포대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지금까지도 후회하는 기억.  낡은 강릉역 앞 짬뽕집.

그리고 제대 후 선배 차에 실려서 다시 찾은 강릉이었다. 선배는 처음 보는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집회 중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이대생이라고 했다.  딱 봐도 삼수를 한 선배보다는 너무도 어려 보였다. 1학년이라고 한다. 나를 데리고,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대화모임의 '양념'으로 싣고 와야 강릉이라는 금단의 땅까지 올 수 있었겠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늦게 도착한 우리들 같은 초짜 외지인에게도 왁자지껄한 경포대는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다. 지독한 불빛 때문에 바다가, 커다란 스피커 때문에 파도가 사라진 관광지였다. 겨울의 경포대는 해수욕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번잡했다. 우리는 빠르게 판단했고 낯선 티를 안 내고 경포에서 초당동을 지나 해안가를 따라 이미 저녁밥 시간이 훌쩍 지나 한적한 안목항에 도착했다.

안목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바닷가 앞 슈퍼에 앉아서 슈퍼 주인아저씨와 고급스러운 흥정을 했다. "사장님이 해산물 아무거나 구해서 조리해주시면 시가로 계산해드리겠다"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을 했고 우리는 새우와 조개가 적절히 섞인 '한판'을 받았고 춥지만 버틸만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늦은 밤까지 신나게 구라를 치는 선배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1학년 자칭 '아무로 나미에'의 콜라보를 지켜보고 있었다.(물론 나만). 민박도 구해주신 고마운 사장님. 안목항의 커피를 아냐고 물어본다. 물론 우리는 서울 사람임을 미리 말했다.

아저씨가 알려준 안목항의 커피는 커피 자판기 서너 대였다. 안목항 끝자락 버스 회차 지점 옆 벽에 나란히 서있던 그저 그런 커피 자판기. 강릉 사는 사람들이 경포로 몰려온 외지인들을 피해 한적한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와서 동전 몇 개를 넣고 즐기는 믹스커피.  장소의 특이함만이 안목항의 자판기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자판기 커피는 관리자가 커피 믹스의 비율을 조절할 수 있다. "2,2,2" 같은 스탠더드 비율부터 한쪽의 비율을 높여준 좀 더 크리미 한 커피. 비엔나커피 같은 고상한 잔은 아니지만 맛은 충분히 그것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관리자의 바리스타 모드(그때는 바리스타라는 용어가 매우 희귀했을 때다.)  게다가 거기 서있는 3대 혹은 4대의 커피 기계가 각자 고유의 맛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주를 마시다 말고 후다닥 걸어가서 커피를 뽑아왔다. 소주의 텁텁함을 한잔 걸치고 커피를 마셔봤다. 동전 몇 개로 얻을 수 있는 맛이라니. 자판기 관리하시는 분은 과연 무엇을 첨가하셨다는 말인가. 안목항의 자판기는 "기계에 대한 분노... 아아 니 기계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밤바다에 치는 파도가 착시를 일으키니 이 종이컵에 담긴 한잔은 안목항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아로 잡히는 데 충분했다.

몇 년이 지나 내차를 끌고 다시 안목항에 들렸다. 그때 한 두 곳만 영업하던 외지인을 위한 식당이 많이 늘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커피가게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자판기도 늘었다.
우리가 그 새벽에 마시던 기계가 어떤 기계인지... 혹은 은퇴를 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릉에.. 이 안목항에 유명한 바리스타가 정착해서 커피 문화를 이끌고 있다고 한다.
안목항 작은 등댓길 옆으로는 새로이 방파제 공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어떻게 변할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십여 년이 지나 내 직업은 다시 바뀌었다. 각 지자체의 지역 축제 광고를 수주하는 일이었다. 이틀 전 홍성 남당리 대하축제를 수주하고 아침 일찍 춘천시청에 가서 연극축제를 받고 인제를 거쳐 산천어를 영접하고 화천군청을 지나 늦은 새벽 속초 어귀 빈 모텔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강릉시청을 찾았다. 새로 지어진 청사는 규모도 거대했고 , 부서를 찾는 일도 용이하지 않았다. 강릉은 예전보다 커졌다.  관련부서 담당자에게 광고 파일을 받았다. 강릉은 커피축제를 처음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번 광고는 무료로 게재해주기로 했다. 원래 관공서 영업은 호혜적인 자세로 허리를 낮게 굽혀 임해야 한다. 커피 한잔을 내어주신다."강릉이 앞으로 커피축제를 지역 축제로 크게 만들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겠지요? " "아 그럼요. 요즘 한국에서 커피 마시는 문화가 일상적이 되어가니까요. 그럼 축제는 주로 어디서 진행하나요? "  " 아 안목 커피거리에서 하지요. 당연히. 거긴 역사와 전통이 있는 커피거리잖아요."
은퇴한 자판기가 생각났다. 길이 굽어지는 곳 벽에 기대어 서있던 그 낡은 자판기. 밤새 찾는 이 없어도 늘 희미하고 가끔은 깜박거리며 서있었던 그 자판기 말이다. 바리스타의 역사로 잠입하기에는 너무 초라한가?

얼마 전 테라로사를 다녀왔다. 고속도로 진출입로까지 완성되어 찾기도 편한 곳이다. 공장의 규모와 시설은 강릉의 명소로 인정받아 충분하다. 커피 한잔을 얻기 위해 30분을 서서 기다리면서도 연신 사진을 찍어 #테라로사 를 남겨야 하는 많은 이들의 덕분으로 강릉은 다시 커피의 도시로 태어났다.

안목항은 남아있다. 여객터미널이 생기고 강릉항이라는 이름으로 크루즈 선이 드나든다. 안목 커피거리는 날씨 좋을 때 바다를 느끼라고 벤치도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브랜드의 커피가 밤이 돼도 성업 중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맘씨 좋은 슈퍼 아저씨도 , 자기 아들방을 내어주시고 냉장고에서 감자를 꺼내 쪄주시던 흰머리 단아한 민박집주인도, 그리고 자판기도 없다. 머 남아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내 기억이 머 그리 소중하다고 남아야 하나. 없어지는 것도 있는 것이지..

아... 선배는 그날 밤 자칭 아무로 나미에에게 좌절하고 그냥 포기했다.  아무로 나미에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새로 좋은 분이 어머니로 오셨는데. 그 어머니 나이가 이 선배하고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났다. 인생은 그래서 아름답다. 늘 갈급하고 좌절하게 만들어주면서 포기를 못하게 만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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