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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May 16. 2023

음식

오늘도 트렌디한 먹거리를 쫒는다

한 접시의 음식을 바라보며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없다. 감사기도를 올리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렴풋이나마 떠오르기만 할 뿐. 그게 현실이었는지, 미디어에서 그려진 아이들의 상냥한 예의범절인지, 꿈에서 나온 내 추억 속의 가공된 이물질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음식에 감사함을 느끼는 잠깐의 명상이 이제는 추잡한 요식행위처럼 보이는 오늘을 산다. 먹기에 앞서서 손을 공손하게 모으는 것 대신, 플래시를 장착하지 않은 선명한 필터로 한껏 도드라진 메뉴를 사진으로 남기거나 게걸스럽게 먹는 표정으로 지금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가 더 적절한 예의다. 그만큼 돈으로 교환가능한 엄청난 먹거리들이 넘쳐난다. 단순히 먹거리뿐만이겠는가. 먹는 이미지들은 TV를 켜면 돌리는 채널의 리드미컬한 버튼 조작에 맞춰서 과장된 표정과 입모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에 호응하듯 인간의 욕구를 채우지 못한 잉여된 음식이 쓰레기통을 비집고 나와 악취와 불쾌한 이미지까지 생성하는 건 당연한 인과관계다. 이렇듯 우리는 이미 과잉된 너무나 많은 것에 둘러싸여 식생활을 보낸다. 반면,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며 허기를 채우는 다른 나라의 삶은 타국이 아닌 다른 행성에서 날아온 기이한 신화처럼 미스터리한 신성함을 아우르고 있다. 

더 먹기 위해서 온갖 노력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섭취하는 것이 특출 난 재능에 이를 정도로 알 수 없는 찬사와 환호로 대중은 호응해 마다하지 않는다. 동시에 모든 것들이 이상향을 바라본다. 친환경, 오가닉, 자연방목, 동물복지, 유기농, 핸드메이드, 비건, 에코프렌들리, 무색소, 슈퍼푸드와 같은 인간에게 당연한 먹거리이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당연한 이유가 각종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되며 매끄러운 고객의 위상에 우아함과 고상함을 한 스푼 떠안기며 오늘의 당신의 입속에 만족감을 세뇌시킨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라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집 앞에서 씨 뿌려서 키우던 야채들이 신성한 노동의 산물로 과장되어 프리미엄과 스페셜이라는 당분간 경제활동을 유지할 마케팅의 한 축으로 추가되며, 두둑한 기업의 지갑 속을 철저하고 단단하게 채우고 그들의 미래에 꽃길을 마련했다. 단순하게도 오늘의 재료가 내일의 모양으로 조금 변형되어 속성은 동일하지만 가공된 트렌드의 추종으로 새로운 음식으로 받들어지며 오늘의 인기를 영위한다. 갑자기 주변을 도배하며 모든 이들의 입속에서 화자 되는 음식은 개인이 거부하며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한적한 외로움만으로 방패막이 삼을 수 있는 고고한 철학은 아니다. 지금을 살고 대중 안에서 미디어를 흡수하며 광고를 무의식적으로 소비한다면 당신은 바로 그 음식을 먹어야 한다. 소셜네트워크는 괜히 네트워크라는 연결성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너와 나는 동일해야 하며 우리를 만드는 단체와 대중을 일컫는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추종이 이끄는 불순한 의도 아래에 입맛의 기호마저 강탈할 조건이 된다. 한 때 여기저기에서 보이던 그 음식과 트렌드를 따르던 사진 속의 그 메뉴가 일순간에 잡종의 불순물로 격하되며 어딘지 모를 추억의 기억으로 추방된 것은 단순히 메뉴가 맛이 없다는 이유가 아니다. 이곳저곳에서 서로 먹어보라는 휘향 찬란한 이미지와 벌컥벌컥 덥석덥석 와구와구 거리며 입이 쓰레기통인지 블랙홀인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흡입되는 음식물의 여과과정을 여지없이 노출시키며 미디어는 사람들의 영혼을 한 방향으로 이끌며 그들을 신성하게 찬양하도록 이끈다. 


먹는다는 건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단출한 명제인 의식주 가운데 생을 유지하려는 욕구였는데, 이미 그 갑갑하게 정제된 프레임을 벗어난 지 오래다. ‘맛있음’이라는 수식어는 과연 본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정도로 사방팔방에서 사용되면서 모든 식당이 맛있는 집이라는 ‘맛집’의 타이틀을 스스로 획득하게 되었다. 너도나도 동의하지 않아도 ‘맛있음’이라는 조건이 성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사소한 취향은 배제된 채 유명세의 명예로운 방문기록이나 가공한 플랫폼의 억지스러운 유도하에 개별적인 의견 따위는 종속된 소수의 보이지 않는 투표함으로 버려질 뿐이다.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는데 많은 수고와 시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결과물의 완성도와 만족도를 떠나 본인이 만들어낸 레시피의 정도는 항상 많은 투자대비 훌륭한 접시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고슬고슬 찐 감자는 그 자체로도 멋진 한 끼가 될 수도 있으며, 각종 첨가물과 화려한 조리방식으로 가공된 감자와 함께 오늘의 식사에 놓여서 매번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맛이 있었다는 훌륭한 식당이 가끔 타인에게는 어긋나기도 할뿐더러 대중이 선호하는 메뉴가 내게 꼭 알맞은 식사가 아니듯이 결정은 본인 스스로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때문에 뉴스피드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룰렛가운데 반짝이는 먹거리 자랑쇼는 가끔 구역질이 날 정도로 기괴하다. “이것을 먹어봐! 너는 바로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사탕발림을 덕지덕지 화면 가득 채우며 잠시의 영혼을 달래는 시간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뒤통수를 때려서 정신을 깨우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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