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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도담 Oct 30. 2022

자존감 지킴이

  나의 대학 친구 현정이는 육아휴직 6개월 만에 직장으로 복직했다. 정확히 말하 지면 '도망'친 거라고 보면 된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


"일하니까 진짜 살 것 같아. 집에서 애만 보면 너무 우울하잖아."


현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앞에 놓인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했다. 대학시절 현정이는 운동을 참 잘했는데,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각종 스포츠를 섭렵한 선수에 가까웠다. 이러한 본인의 특기를 살려 그녀는 태권도 사범이 되었는데 정말 잘 어울렸다. 그렇게 활동적인 성향을 가진 현정이게 오로지 집에서 할 수밖에 없는 육아는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넌 군인을 했어야 했는데, 진짜 국가적 손실이야."


서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배시시 웃었다. 마치 대학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로가 벌써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 이 믿기지 않았다.


"너 벌써 복직한 지 2년 되지 않았어? 완전히 적응했구나."


  현정이 말에 나도 회사에 복직했을 때가 생각 났다. 벌써 그게 2년 전 일이라는 게 새삼 놀라웠다. 시간이 빠르다 못해 총알처럼 지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20년 6월 29일. 이 날은 내가 회사로 복직한 날이다. 그 전 날 밤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아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랜 휴직 기간으로 머리가 많이 굳어서 건망증이 심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라, 재택근무가 가능하도록 원격 연결을 해야만 했다. 메일로 받은 매뉴얼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먹통이었고, 쩔쩔매다가 결국 업무지원팀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간단한 엑셀 파일을 만지는 법도, 업무 결재를 올리는 법도 모두 하얗게 잊어버린 나는 절망했다. 어중간한 '중고 신입'이나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이 머리로 대학은 어떻게 갔으며, 이 회사는 또 어떻게 들어왔을까.'


누가 내 머릿속을 지우개로 하얗게 지운 것 만 같았다. 자신감에 이어 자존감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회사생활을 이어나갈수록 퇴사 생각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육아에 전념하던 내가 일을 시작하니 그 전엔 볼 수 없었던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일을 포기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단 사실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키'는 내가 쥐고 있다는 생각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죄책감에 많이 괴로워했었다.


그럴 때마다 큰 힘이 되어준 건 우리 금쪽이, 신랑이었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건 물론이고, 주말만 되면 나랑 지율이를 태우고 항상 드라이브를 갔다. 외식을 하게 되면 내 기호에 따라 메뉴를 정했고, 일한다고 집에서 또 점심 대충 먹고 있을 아내를 생각해서 배달 앱으로 음식도 주문해주곤 했었다.


"당신은 젊고 똑똑한데, 집에서 아이만 보는 게 안타까웠어. 그래서 복직한다고 했을 때 진짜 많이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어."


난 아직도 신랑이 나에게 해준 저 말을 잊지 못한다. 신랑은 자기가 그런 말을 했냐면서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말이다. 자기 연민에 빠질대로 빠져 있던 나에겐 쓰러져있던 자존감을 일으켜 세워주는 따뜻한 말이었다. 동시에, 여기까지 버텨온 게 순전히 나의 노력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신랑 없었음 이렇게까지 못 버텼지."


잠시 지난 2년을 회상하던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랑은 가끔은 날 속상하게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내가 진심으로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걸 나도 모르게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참 소중한 존재다.


그렇게 약속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제 와? 지율이가 엄마 찾아. 나 힘들어."


"금방 갈게. 거의 다 왔어."


총총걸음으로 걷던 나는 전화를 끊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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