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계단과 나룻배
로마 시내 투어 첫 만남의 장소는 스페인 광장 콘도티 거리에 있는 샤넬 매장 앞이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바로 집합 장소로 향했다. 건물 사이사이 왼쪽 오른쪽, 설계자를 따라 우리는 일렬로 걸어갔다. 평탄치 못한 길을 걷다 보니 자꾸 눈길이 바닥으로 향했다. 바둑판처럼 박혀 있는 네모난 돌덩이들의 나이는 수백 살은 되겠지.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을지, 조각상이 아니라서 유물로 인정을 못 받겠지만 돌 하나하나가 마치 수백 년 간 스쳐 지나간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의 꼬리가 끊어질 때쯤 골목 끝에서 확 트인 광장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강렬한 햇볕을 피해 그늘진 곳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투어 팀이 모두 모일 때까지 바닥에 철퍼덕 앉아 기다리고 있었고 샤넬 매장의 문이 열릴 때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샤넬 직원이 시간대별 예약 손님을 받느라 문 앞에서 기다리는 손님의 신분을 확인하는 그 몇십 초, 우리는 값비싼 샤넬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었다.
투어 인원이 확인되자 가이드는 수신기와 이어폰을 13명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단체여행은 고교 졸업 후 처음이라 확성기가 아닌 수신기와 이어폰을 쓴다는 새로운 사실은 나 스스로를 별나라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오늘 투어 코스는 스페인 광장을 비롯하여 트레비분수, 판테온,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캄피톨리오 언덕, 포로로마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가야 할 곳을 늘어만 놓아도 호흡이 목까지 올라오는 거 같은데 이 모든 곳을 걸어서 가야 한다고 하니. 제시간에 맞게 끝나기 위해서 잘 따라오라고 가이드는 특히 우리 가족 팀에 눈길을 더 오래 두며 당부를 했다. 다행히 우리 구성원들의 걷기는 어릴 때부터 훈련이 잘 되어있었으니 두렵지 않았다.
가이드는 설명부터 하고 이동하겠다며 스페인 광장과 스페인 계단의 이름이 붙어진 유래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광장은 17세기 스페인 대사관이 이곳에 생기면서 이름이 붙여졌는데, 스페인 계단은 좀 다르다고 했다. 스페인 광장보다 더 널리 알려진 스페인 계단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의 후원으로 프랑스 외교관 게프리에 의해 설계되어 인노첸시오 13세 교황이 완성한 계단이다. 따지고 보면 프랑스가 설계하고 자본을 투자했으므로 프랑스 계단이라고 불려야 마땅한데 어찌하여 스페인 계단이라 불리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길게 성토했다. 더군다나 스페인 계단 끝에 높이 세워진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도 프랑스 성당인데 왜 스페인 계단이라고 하는지 프랑스 입장에서 굉장히 억울할 거 같다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프랑스가 억울할 만할 것 같았다. 이제라도 프랑스 계단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끝나자 가이드는 스페인 계단에 가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오후 두 시 무렵 스페인 계단은 햇볕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스페인 계단이라고 해서 쨍쨍한 태양 아래 앉아 오드리 헵펀이 된 듯한 상상에 젖으려 하지 않았다. 계단은 오고 가며 걸어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잠시나마 스페인 계단에 앉아 낭만을 느끼고 싶었지만 강렬한 햇볕 때문에 불가능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엉덩이만 붙였는데도 ‘앗 뜨거워! 빨리 찍어주세요’ 하며 얼른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저 뒤편으로 보이는 성당과 오벨리스크, 광장 한복판에 있는 바르카치아 분수가 더위와 한판 승부를 하고 있는 듯했다. 바르카치아 분수는 베르니니 집안에서 설계한 분수라고 하는데 이처럼 전문가에 의해 설계된 분수를 포함하여 약수처럼 흘러나오는 분수까지 모두 합치면 로마 곳곳에 약 2000개의 분수가 있다고 한다. 1598년 티베르 강이 범람하여 그 당시 배가 이곳 스페인 광장까지 떠밀려왔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바르카치아 분수는 단조롭고 못생긴 분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제야 나룻배처럼 생긴 이 분수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