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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Stealer Sep 21. 2024

로마의 아침

갈매기와 에스프레소

시차 때문인지 새벽 5시쯤 눈이 떠졌다. 낯선 공간과 낯선 냄새에 내 눈과 코는 깜짝 놀랐다. 밖은 밝아오고 있었고 창문을 여니 아침의 선선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테라스로 나가 보니 겹겹이 로마 집들의 지붕과 창문들이 보였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이 생긴 게 하나도 없었다. 집, 지붕, 기와, 창문의 모양과 크기까지 모두 제각각이었고 건물 색상조차 다양했다. 


로마가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바람은 바닷바람처럼 선선하면서도 기운찼고 푸르른 하늘에는 띄엄띄엄 새들이 날아다녔다. 무리 지어 날아다니던 비둘기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건물 꼭대기에 세워진 안테나들 위로 끼룩끼룩 울며 외롭게 날아가는 한 마리의 갈매기였다. 아침 일찍 무슨 일로 로마까지 왔을까. 비행기 조종사였던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이 생각났다. 더 높이 더 멋지게 비상하는 꿈을 향해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의 비아냥과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이야기. 저 갈매기도 조나단 같을까?

살다 보면 세상일이나 사람들일로 이리저리 치이고 자신의 한계로 좌절과 절망을 느끼며 주저앉기도 한다. 내가 생활했던 공간의 반대편에 앉아 하늘을 가르는 저 낯선 갈매기를 보며 조나단을 떠올리고 자아를 반추해 보는 이 순간이 로마의 아침이라니. 공간의 이동은 이전 공간에 쌓였던 오래된 관습을 털어내고 이동한 거리만큼 새로운 영역을 확장해 주어 군더더기 없는 생각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과거의 군더더기가 사라지니 테라스에서 바라본 로마의 아침은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베이징의 아파트 숲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기와지붕과 안테나들, 끼룩끼룩 날아가는 한 마리의 갈매기를 보며 나와 남편은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셨다. 다시없을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조용한 로마 아침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미각과 후각이 남다른 남편은 로마만의 특유의 냄새가 있다며 말로 표현하려고 굉장히 노력했지만 결국 적절한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나도 그 특유의 냄새를 간직하고자 눈을 감고 오랫동안 맡아보았는데 뭐랄까. 오래된 건물의 냄새, 오래된 책장 냄새, 바다의 소금기를 뺀 냄새, 밀폐된 햇볕 냄새가 혼합되었다고 하면 맞을까. 내가 비유한 혼합된 냄새에는 고유성을 품고 있지 않았지만 설계자인 남편이 비유하지 못한 로마의 냄새에는 확정 지을 수 있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베이징에 돌아와서도 로마의 냄새가 난다고 종종 말을 하니말이다.  


쓴 커피를 선호하지 않아 평생 에스프레소는 마셔볼 엄두도 못 냈던 내가 로마의 첫날 아침 숙소 테라스에서 에스프레소를 처음 맛보았다. 그 맛은 쓴맛과 단맛의 기품 있는 조화였다. 쓴맛은 오래 세월 끊임없이 자기 수련을 통해 성장한 조나단의 고통만큼이나 성숙된 농후한 쓴맛이었고 단맛은 고통을 통해 꿈의 실현을 이룬 조나단의 기쁨만큼이나 다디단 단맛이었다. 쓴맛과 단맛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에스프레소는 그야말로 단 한 모금으로 인생을 말하는 어마어마한 커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에스프레소 하면 로마의 아침 하늘을 가르던 갈매기 한 마리와 조나단이 떠오를 것 같다. 제각각이던 로마의 창문들과 지붕들, 안테나와 굴뚝들, 테라스에 걸려 있던 빨랫줄과 빨래집게들 모두 안녕한지, 끼룩끼룩 소리들과 옆집 배기통에서 흘러나온 토스트 굽는 냄새와 마멀레이드 향, 난간에 묶어놓은 긴 은박지들은 여전한지, 안부를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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