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묵은 공간
숙소는 판테온까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판테온 주변이라는 것은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중심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주인 말대로라면 숙소 건축물은 14세기 중반 중세시대 말기부터 르네상스 초기에 걸쳐 만들어졌으니 약 500년이 넘는 세월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 가족의 거주지 베이징은 약 8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베이징의 500여 년 된 건축물을 보자면 1406년부터 짓기 시작한 고궁 즉 자금성이 있다. 고궁은 500년이 넘게 권력의 중심지였고 24명의 황제가 거주했던 황궁이기도 하다. 주변에 지어진 왕부들의 사합원(궁)들은 박물관이 되었고 백성들이 살았던 사합원 집들에는 지금도 베이징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역사적 건축물로 동서양인들의 삶을 비교해 보려 한다면 로마의 펜트하우스와 베이징의 사합원을 살펴봐도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동양의 도시 베이징에 살다가 더 오래된 서양의 도시 로마를 와보니 세월의 중압감이 느껴져 사뭇 숙연해졌다. 우리는 대리석 돌계단을 빙빙 돌며 오르고 올라 꼭대기 충에 다다랐고 쇠로 된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탈리아 아주머니께서 방 정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입실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당일 오전에 떠난 손님들 방을 정리 중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봉주르노’ 인사를 전했다. 우리도 협력자가 가르쳐준 ‘봉주르노’라며 운을 뗐어 봤는데 그 어색함에 서로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영어를 못하시는 아주머니는 금방 끝날 거라는 이탈리어 말과 함께 눈짓, 손짓, 몸짓을 동원했다.
정리정돈을 마친 숙소를 보자 우리는 첫눈에 반했다. 구조는 긴 직사각형 면적에 방 2개, 거실 2개, 테라스 2개, 화장실 1개가 있었고 방과 거실은 높낮이가 달라 문 사이에 작은 계단이 있었다.
누군가 오래 살다가 잠깐 집을 비운 듯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웠지만 치장하지 않았고 고풍스러웠지만 모던한 감각을 놓치지 않으며 현대적 편리성을 추구하였지만 고대의 기품을 잃지 않았다.
우리의 애정 어린 눈길은 집안 곳곳을 훑던 중 설계자의 흥분을 누른 듯한 묵직한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다들 이리 와볼래? 여기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거실 테라스 창가로 모였다.
‘놀라지 마, 진실의 입이야.’
이번 여행에서 ‘진실의 입’ 관람 일정은 없었기에 우리의 눈은 동그래져서 서로의 몸을 쑤셔 테라스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리고 발견한 오른쪽 벽면. 거기엔 오드리 헵번이 본 그 진실의 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하고 심지어 살짝 무서운 얼굴이었지만 분명 진실의 입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고대 얼굴의 조각상이었다. 아래 세면대인지 분수대인지는 모르겠으나 형태를 보고 추측하자면 로마의 하수도를 끌어올려 물을 공수받았던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로마 시내를 돌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리 곳곳에 저렇게 고대 조각상 같은 입에서 지하수가 24시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걸 통칭해서 ‘분수’라고 했고 로마 시내에만 2000개가 넘는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하수 내지는 약수라고 해야 할까. 많은 관광객들이 더위에 지쳤을 때마다 시원하게 한 모금씩 마시거나 물통에 물을 담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도착 당일 오후 일정으로 로마 일일투어를 신청해 두었기 때문에 숙소 탐색은 다음으로 미루고 로마시내투어를 위해 집합 장소인 샤넬 매장을 찾아 나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