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만든 신전
숙소가 판테온 근처라서 우리는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판테온을 지나치며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꿈같은 일이었다. 이천 살이 넘은 고대 유적을 하루에 서너 번 실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영광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지나쳐 볼 때마다 판테온에서 뿜어 나오는 육중함과 거대함에 압도되어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기원전 시대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판’과 ‘신’을 뜻하는 ‘테온’이라는 의미로, 판테온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보통 하나뿐인 신을 위해 신전을 짓는데 여러 신을 모시는 신전을 짓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마르쿠스 아그리파에 의해 처음 세워진 판테온은 일곱 행성의 일곱 신을 모시기 위함이었는데 당시 로마 제국은 다신교 국가로서 정복한 주변 나라들을 흡수하고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판테온은 아그리파가 지었을 당시에는 사각형 구조의 목조 건물이었다. 그러나 기원후 80년에 화재로 파손된 후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서로마제국 이후 608년 포카스 황제가 판테온을 보니파우스 교황한테 기증하였고 교황은 이듬해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판테온의 내부 구조가 소리의 울림이 좋아 음악당으로 이용되어 음악회도 가끔 열린다고 하니 유적물로 남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활용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신전에 들어가는 입구를 그리스어로 ‘프로나오스’라고 하는데 총 16개의 화강암 기둥이 세워져 있다. 판테온의 프로나오스는 그리스의 파르테논을 연상케 했다. 신혼여행 때 갔던 그리스의 파르테논은 당시 공사 중이라 전체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판테온의 ‘프로나오스’와 거의 흡사했다. 프로나오스에 세워진 기둥 윗부분에 이 신전을 만든 사람을 기리기 위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글자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될 때 써졌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처음 세웠던 아그리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루키우스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지었다.” 자신의 이름은 없고 아그리파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건만으로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어떤 황제였음을 짐작할 만했다.
우리는 아침 9시 전에 일찌감치 나왔는데 눈 깜짝할 사이 관광객들의 행렬로 로톤다 광장은 꽉 채워갔다. 입구에는 여러 줄이 있었는데 우리는 눈치껏 현장 판매 표를 구매하여 입장하는 줄에 줄을 섰다.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는 상인들이 있기 마련, 명품 가품 스카프를 왼팔에 가득 안고 인도계인 듯 중동계인 듯한 상인들이 유럽의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스카프를 펄럭이며 구매를 유도하고 있었다. 금액은 중국에서 파는 가품에 비해 약간 비싼 느낌이었지만 관광지이니 그 정도면 바가지는 아닌 것 같았다.
판테온 앞 로톤다 광장에는 오벨리스크가 하나 세워져 있다. 안타깝게도 공사중이라 가까이에서는 볼 수 없었다. 로마에만 13개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그중 8개가 이집트 람세스 2세 때 만들어진 것이란다. 로톤다 광장 앞 오벨리스크를 포함 프로나오스에 있는 기둥들도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14미터의 기둥 하나가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통째로 된 기둥이란다. 현대의 크레인으로도 움직이기 어려울 듯한 크기와 무게일 듯싶은데 그때 당시 사람들은 신과 같은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믿기 어려운 현상들 뿐이었다.
판테온 내부로 들어가면 중앙 천장에 둥글게 뻥 뚫린 구멍 오쿨루스가 있는데 판테온 건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중앙에 저렇게 구멍을 내고도 이천 년을 견뎌내다니,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만들었을까, 인간의 사고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상상력 밖의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판테온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천사의 설계’라고 칭송했는지 모른다.
건축 자재는 화산재가 들어간 모르타르로 로마식 콘크리트를 만들어 사용해 물에 강하고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철골도 없이 천장에 지름 9m 정도의 구멍(오쿨루스)을 만든 것도 놀라운데 판테온 내부의 가로, 세로가 43.3m로 똑같다고 하니 숫자만 보더라도 기적 같은 수학적 신비가 작용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천장은 5개의 층에 각 28개의 격자무늬가 모두 140개로 만들어졌고 그 28이라는 숫자는 1부터 7까지의 숫자의 합으로 과학적으로 완벽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모든 신의 신전이라는 말처럼 모든 신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유일무이한 완벽한 건축물인 아닌가 싶다.
판테논 내부에는 성 요셉 경당이 있고 예술가의 성지라고 할 만큼 예술가들의 묘가 많았다. 판테온을 너무 사랑하여 스케치도 많이 했다던 라파엘로는 자신이 죽으면 판테온에 묻어달라고 하여 1520년 공교롭게 생일날 세상을 떠난 라파엘로의 묘가 안치되었다. 라파엘로의 절친으로 알려진 베드로 추기경이 라파엘로를 위해 쓴 애도시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외 예술가 안니발레 카라치, 아르칸젤로 코렐리의 묘가 판테온에 있으며 1870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는 움베르토 1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마르게리따 여왕의 묘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원통으로 되어 있는 내부는 몸만 돌리면 한눈에 모든 걸 감상할 수 있었다. 오쿨루스로 내려오는 빛 아래서 한 동양인 젊은 커플은 예술사진이라도 찍듯 우아한 몸짓을 보이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제단 앞에 놓은 긴 벤치에 앉아 공간의 거룩함을 느끼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비가 오면 오쿨루스 사이로 떨어지는 빗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구멍도 확인해 보고 둥글게 돌며 위인들의 묘와 그림을 둘러보았다. 아쉽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우리는 기원전 27세기에서 나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