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본디
꼭 나이를 먹어서인 것 같지는 않고,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 바람도 오래 쐬지 못한다. 해서 집에 있을 때는 마파람이 통하도록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는데 그러다 보니 모기랑 파리랑 같이 부대낄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구나 그렇듯 모기는 잡으려 애쓰지만 파리는 보통 그냥 두는 편이다. 그러다 독서를 비롯해 일을 방해할 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안착해 있는 놈은 파리채로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지만 문제는 보란 듯이 눈앞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녀석이다. 그런 놈들일수록 잘 앉으려 들지도 않는다. 나름대로는 오랜 경험 끝에 처리할 방법을 터득했다. 녀석이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순간을 노린다. 그리고 가차 없이 스매싱을 날린다. 헛방일 때도 물론 있지만 의외로 타율이 높은 편이다. 이번에도 유효타였다. 녀석은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바닥에서 빌빌거린다. 그 와중에도 파리 아니랄까 봐 살려달라 비는 모습 같았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반증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차후 차분히 살펴봐야겠다) 여하튼 지금 이 녀석은 놔두면 알아서 자연사하겠거니 하고 굳이 확인사살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넓은 건지 더위라도 먹어서 제정신이 아닌 건지 그건 분명치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깨달음은 있었다. 글쓰기를 이렇게 날아다니는 파리 잡듯이 할 필요가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곳을 강타해야 한다. 읽는 이들이 훤히 내다보는 곳은 백날 잘 쳐봐야 본전이다. 무엇이든 급소는 대개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기 마련이고 글쓰기도 예외가 아니라면 읽는 이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때려서 쓰면 모두 자지러지지 않을까. 글이 드셀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으려 들면 당연히 되려 반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잡으려 드는 것이 덜미라면? 목덜미를 잡혀도 물론 반격은 가능하겠지만 쉽지 않은 일이며 예상치 못한 덜미를 잡혔을 때 바로 반격 가능할 정도의 고수라면 당해주는 것 또한 마땅한 일 아닐까?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파리 한 마리가 또 들어왔다. 아까와 같이 했고 이번엔 그때보다도 느낌이 확실했는데 결과는 영 시원치 않다. 읽는 사람들이 예상을 하네 못하네 그런 시건방진 생각 따위 할 시간에 그저 한 자라도 더 읽고 더 쓰고 더 생각해라는 계시로 삼는다.
몇 해 전 이맘 즈음이 문득 생각난다. 당시 돌이 막 지난 조카를 유아차에 태우고 땡볕이었을 때도 자주 바깥 산책에 나섰다. 육아에 지친 누나와 매형을 이때라도 조금이나마 돕자는 마음도 있었고 집에서는 잠을 잘 안 자는 조카가 밖에 나와 유아차를 타면 신기할 정도로 금세 잠드는 걸 보면 절로 웃음이 나 기분이 좋아지기도 해서였다. 그러다 잠에서 깨도 만나는 사람들과 접하는 풍경을 말 그대로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도 좋았고.
그러다 한 번은 너무 더워서 시원한 카페에서 좀 쉬다 가자 싶어 들렀고 별생각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고 있는데 쪽쪽이를 빨던 조카가 슬며시 동작을 멈추더니 나를 똘망똘망 쳐다본다. 내 커피를 원하는 게 분명했다. 보이지 않는 파리도 잡는 내가 코 앞에서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있는 내 조카가 원하는 걸 모르겠는가. 아이의 눈높이랑도 맞추어 기꺼이 같은 수준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우워어어! (어서 그 까만 액체를 내 앞으로 내놓으시오!)”
“우워어엉! (어림없는 소리 말고 네가 먹던 거나 먹어라!)”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서 왔다지만 삼촌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는 듯한 원망 어린 입매는 이내 씰룩거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많이 서러웠는지 소리가 상당했다. 당연히 카페 안 주변 사람들에게 죄송하고, 조카한테도 미안하고, 나도 울어버릴까 진지하게 0.5초 정도 고민하다가 일단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적이 불편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스스로의 원망 때문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내 옆 테이블에는 나처럼 혼자서 아이를 데려온 여성분이 계셨는데 조카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뭇사람들이 던진 심기 불편 가득한 눈초리는 처음에 나를 향했었다가 잠시였을 뿐 그 여성분과 아이를 향해 더 오래 머물렀다. 그 아이는 정말 얌전히도 앉아있었는데도 분명 그랬다. 내가 진정으로 미안함을 느껴야 했던 대상은 카페 안 그 사람들도, 내 조카도 아닌 그 여성분과 아이여야 했거늘 나는 그때 단지 무지했던 게 아니라 무심했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그 여성분도 나처럼 카페를 나왔을지 계속 계셨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 그 분과 나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페미니스트들을 응원한다 한들, 서른이 훌쩍 넘은 소위 ‘한남’으로서 지니는 어떤 원초적인 한계는 인정해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더라도, 아니 그래서라도 더욱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지금은 굳혔다.
세월호 유가족 분들에게 위로를 건네던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어떤 치가 “교황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덜 떨어진 소리를 건네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던 바 있다. “타인의 고통에 중립 같은 건 없다!”라고. 지난 영문본색에서 故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인용하며 같은 말을 했었지만 신앙인들의 이런 참된 종교적 언행이 그 어떤 전도보다 큰 힘을 지닌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언급한 내 직접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고통을 느끼는 쪽은 남성들보다는 엄연히 여성들이며 여기에 중립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당사자들이나 나와 같은 생각의 결을 하는 분들의 ‘라이킷’ 같은 반응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은 이런 소리를 하는 내가 앞으로의 잡문에서는 산통 깨는 소리를 할 수 있고 거기에 합당한 지적을 받더라도 끝내 고집을 부릴 수도 있다. 인간이 본디 그런 존재라고 변명해 본다.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 하면서 거기 떨어진 남이 버린 쓰레기는 또 아무렇지 않게 줍는, 애당초 이해와 설명이 난해한 생명체가 우리네 인간이라 믿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