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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철 Jul 21. 2023

번역본색 2

눈속임은 요령이 아니라 태만이다

지난 번역본색에서 한 해 출간되는 책들 가운데 번역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치에 달한다고 썼는데 <서울리뷰오브북스 10호>를 읽다가 김병희 씨의 글에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어 있어 먼저 인용을 해본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국 출판 시장에서 번역서 비중은 출간 종수 기준 17퍼센트이다. 좀 오래된 통계이지만, 2004년에 한국 출판은 세계에서 번역서가 가장 많이 출간된 시장이었다. 2007년 <뉴욕타임스> 기사에 인용된 통계에 따르면 2004년 한국은 체코와 함께 번역서 비중이 29퍼센트로 가장 컸다. 이 해에 미국은 출간된 책 100권 가운데 3권 정도, 일본은 8권 정도가 번역서였다. 지난 20여 년 동안 번역서 비중은 29퍼센트에서 17퍼센트로 줄어든 셈이지만 여전히 높다. 게다가 2007년 12,371종이었던 번역서가 2022년에도 10,472종으로 1년에 1만 종 이상의 외국 도서가 번역, 출간되고 있다. 주요 출판 시장 가운데서도 한국 출판은 번역에 진심이다.”


글쓴이의 주장에 딴죽을 걸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지만 인용한 마지막 문장에서 고개가 좀 갸웃거렸다. ‘정말 진심인가? 정녕 진심이라면 무척 서글픈 마음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실제로 개인적으로 믿고 읽는 번역자 중 한 분은 (함부로 성함을 밝히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해마다 큰 비중으로 줄어드는 번역서의 현실에 큰 우려를 표했다. 해마다 만 종 이상의 외서가 그래도 번역 출간되고 있다는 것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음은 번역이 생업과도 같은 전업인 이들에게는 마땅한 입장일 것이다. 그냥 좀 세게 말해야겠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비해 번역 현실이 다소 나아졌을 뿐, 그걸 진심이라고까지 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문인을 배출하는 가장 큰 등용문이었던 신춘문예에 번역 문학이 포함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던 사실 하나로도 사실 많은 걸 보여준다. 시나 소설은 작가의 역량이 십분 발휘되는 창작물이라고 인정하는 반면에, 번역은 단지 언어만 바꾼 기능성 생산품이라는 인식이 예나 지금이나 저번에 깔려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미국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보니 주변에서 ‘번역만 해도 용돈벌이 정도는 충분히 하겠다’는 식의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럼 경영학과 전공이면 구멍가게만 해도 용돈 벌이는 충분히 하는 거냐는 식으로 정색하며 되묻고 싶은 욱한 마음이 이 글을 쓰는 지금 갑자기 들지만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열 내지 않기로 한다.     


혹여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서도 번역을 가볍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 싶어 故안정효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열을 식혀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자신문 (이 ‘영자신문’이라는 것도 번역과 관련해서도 올바른 단어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기는 한데 일단 다음 기회로 넘긴다) <The Korea Times>에서 오랫동안 근무했고 편집국 문화체육부장까지 역임했다. 그러다 지난 번역본색 1편에서 언급했듯 그가 번역한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자 여기저기서 번역 일감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그는 부장직을 사임하고 번역에 전업하기로 결심한다. 모두들 그를 미쳤다고 했고 그 역시 당시에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음이 사실이었지만 후회는커녕 어떤 미련이나 아쉬움 하나 없는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런 투철한 사명감으로 번역에 임했기에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한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의 직업정신은 어느 정도였을까? 존 업다이크의 <Rabbit is Rich>를 번역할 때는 주인공이 자동차 판매상이었기 때문에 자동차에 관한 전문용어들과 배경 지식들이 원서에도 등장하기에 본격적인 번역에 임하기 전에 그런 부분들을 먼저 통달하려 별도의 학습을 공들여서 했다. ‘원작자’인 작가들은 본인의 작품에 필요한 부분들만 선별해서 공부하고 취재할 수 있지만, ‘번역자’의 입장에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들까지도 익혀야만 원서에서 해당 부분들을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에 실제로 전문 번역가들 다수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서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안정효 선생은 원어의 발음까지 그대로 옮겨야 올바른 번역이라는 이유로 ‘카잔차키’라고 해야 옳다고 주장한 바 있다)의 <The Last Temptation>을 번역할 때는, 선생은 무신론자이지만 작품에서 기독교가 워낙 중심적으로 다뤄지기에 기독교 교리를 비롯해 관련 학습을 역시 별도로 해야 했고, 동물 행동학자의 작품을 번역할 때는 마찬가지 이유로 동물 행태학을 관련 전문가들의 자문까지 받아가며 공부했고, 영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으로 유명한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교양서적, <Energy: The Fuel of Life>를 번역할 때는 급기야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 서적들까지 뒤적이며 공부했다고 회고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선생의 공력이 빛나는 작품 중 하나인 <오역사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내 잘못이나 단점이 남들 눈에는 가장 먼저 띄기 마련이다. 눈속임은 요령이 아니라 태만이다.”     


지금이야 인터넷만 연결되면 무엇이든 배우고 익히는데 수월한 부분들이 많지만, 선생이 한창 번역에 진심이었던 당시에는 (그렇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진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용어나 대상을 익히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선생에게는 ischuria라는 단어가 그랬었다. 쭉정이 번역가들이라면 ‘이스츄리아’ 혹은 ‘이스큐리아’ 정도로 쓰고 (쓰고 보니 영어의 맹점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발음 문제이기도 한 것이 드러난다. 이 역시 일단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으로 넘어간다) 어물쩍 넘어가겠지만 선생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단어였고 문맥상 필시 병리 현상 중 하나라는 확신 하나만 가지고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한 끝에 ‘요폐’라고 하는, 방광에 열이 생겨 소변을 보기 어려운 병리 현상임을 알았다. 그러자 번역 자체가 수월해졌다고 한다. 주인공에 대한 별다른 묘사 없이 그가 이 병을 앓고 있다는 정보뿐이었는데 이게 어떤 병인지를 알고 나니까 굳이 별다른 성격 묘사가 필요치 않았겠다는 게 바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번역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욕심도 났었지만 안 선생님과 같은 공력을 들일 자신이 도저히 없어 정중히 고사했고 이후로는 제의를 받은 적도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늘 묻는다. 바쁘다, 힘들다, 내 일과 직접 관련 없는 일이다는 식의 핑계들로 눈속임 부리는 태만을 보이는 건 아닌지.      


이 자리를 빌려 나마 다시금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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