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승철 Jul 23. 2023

번역본색 3

반역으로 가는 번역의 길은 1:1 대응으로 포장되어 있다 

지난 영문본색에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번역에서 가장 지양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는 우리말과의 1:1 대응이다. 고유명사를 비롯해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섣부른 1:1 대응은 오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쉬운 단어나 표현을 접하면 별생각 없이 바로 번역하는 경우에서 그러한데 예컨대 Who’s crying?이라는 말 하나도 물론 ‘누가 울어?’ 하는 의미로 먼저는 생각이 들더라도 문맥에 따라서는 충분히 ‘울긴 누가 운다 그래?’ 하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항상 꼼꼼히 따져보는 자세가 번역가에게는 꼭 필요하다. 출판평론가이자 편집자인 변정수 선생은 “무식한 편집자는 용서해도 무심한 편집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인상적인 말을 한 바 있는데 번역가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번역본을 들춰볼 때마다 번역가든 편집자든 무심한 이들이 자주 눈에 걸린다.     


개인적으로는 ‘거위 사냥’이라는 말을 접할 때 그렇다. 거위를 직접 키워본 바도 있고 해서 애착이 더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조금만 생각해도 저 말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총이든 칼이든 덫이든 해를 가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사냥’에 나서야 하는데 그 대상이 멧돼지나 곰도 아니고 거위라니. 그 대상에 소나 닭을 대입했을 때 뭔가 많이 어색하다고 여겨지면 응당 거위도 마찬가지다. 물론 거위 사냥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족제비 같은 야생 동물이 거위를 노리고 나서는 건 충분히 거위 사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사람일 때는 아무래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쩌다 그런 말이 생겼을까? 아마도 이 역시 goose나 그 복수형인 geese를 보고 1:1 대응으로다가 무조건 거위를 떠올려서 그랬을 것이라 본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기러기’를 가리킨다. 물론 기러기를 엄밀하게 영어로 지칭할 때는 goose나 geese 앞에 wild를 써줘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거위든 기러기든 통칭해서 goose나 geese로 자주 쓰기 때문에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꼭 구별을 해주어야 하는데 보다 심하게 말하면 번역은 둘째치고 거위랑 기러기를 구별 못하는 번역가들도 분명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당연히 찾아보고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번역가들이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땅의 거위랑 기러기 수만큼이나 많다고 여기는 바, 그러면서 또 거위 간에는 환장할 것이다.     


이렇게 냉소적으로 비꼬지만 실은 나 자신부터 분발하자는 의미도 있다. “거미가 덫을 놓는다”는 표현을 접하고 나는 그 역시 trap=덫이라는 1:1 대응이 빚어낸 오류라고 생각했었다. 거미라고 해서 꼭 거미줄로만 사냥하지는 않겠지만 기껏해야 나름대로의 함정을 파는 정도겠지, 설마 덫을 놓겠는가 싶었는데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농발거미는 정말로 나뭇잎들을 엮어 덫처럼 만들고 놓아서 개구리까지 사냥하는 걸 보고 내가 다 그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니 그래서라도 늘 번역을 따져봐야 한다. 언젠가는 ‘태평양 운동’이라는 번역을 보고 이건 필시 ‘태평양 전쟁’의 오역이라 생각했었다. 다만 그 원문이 The Pacific War가 아닌, The Pacific Campaign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내 생각이 맞았다. campaign만 보면 1:1 대응이 자판기처럼 반응해서 으레 떠올려지는 ‘캠페인’ 내지는 ‘운동’이 되는데 결코 적지 않은 경우에서 campaign은 battle보다 큰 규모의 전투를 의미해서 war과 상응해 쓰이기도 한다. 이건 ‘대서양의 편지’라는 역시 어처구니없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는데 먼저 원문에서 쓰인 The Atlantic은 수능이나 모의고사 영어 지문으로도 종종 발췌될 정도의 학술적 글들이 쓰이는 미국의 문학지다. 그리고 함께 쓰인 letter는 편지가 아니라 그 잡지에서 쓰였던 특정 ‘문자’를 가리킨다. 이 역시 부연할 필요 없이 그저 The Atlantic과 letter만 보고 대서양과 편지라는 자동응답기식 반응이 빚어낸 1:1 대응 번역의 심각성이다. 이쯤 되면 해당 번역가는 물론 담당 편집자의 자질 또한 의심스러워진다. ‘태평양 운동’과 ‘대서양의 편지’ 같은 번역을 접하면 마땅히 의심을 품고 원문을 살펴야 한다. 해서 실제로 많은 현역 편집자들이 그런 하자 있는 번역들이 하도 많아서 ‘편집’이 아니라 거의 ‘공역’에 가까울 정도의 ‘고역’ 중이라는 풍문을 업계로부터 들은 바 있다. 가히 태평양과 대서양에 버금갈 넓은 아량으로 지금도 ‘노역’하고 있을 그들께 마음으로나마 응원드린다.     


끝으로 노래마다 창법을 달리하는 가수들이 있다. 그래도 고유의 음색은 변치 않아서 목소리를 들으면 그 가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한편, 또 어떤 노래에서는 아예 음색마저 바꾸어서 그 가수라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도 있는데 번역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마다 문체가 다르듯 똑같은 번역자라도 각각의 작품마다 원문에 맞는 문체로 번역을 달리 해야 한다. 이번에도 故안정효 선생의 경우를 보자면 선생은 McCullough의 유명작, <가시나무새(The Thorn Birds)>를 번역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술회했는데 이유인즉슨 저자가 실연 후 깊은 상실감과 비애를 가지고 골방에서 1년 가까이 칩거하다시피 쓴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어서 문체 자체가 한 마디로 거칠고 우락부락하기 짝이 없어 그에 맞는 번역이 정말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원문은 그렇더라도 번역은 다듬어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싶지만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번역은 반역이다” 같은 소리를 듣는다는 게 선생의 평생 소신이었으며 논쟁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 역시 선생의 길이 옳았다고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영문본색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