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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19. 2023

오늘을 살아가는 원동력

브런치에 글을 써야 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근데 나 왜 쓸 게 없지? 주말 동안 따땃한 집 안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더니 머리가 굳어버렸나 보다. 괜히 연재한다고 했나 살짝 후회가 됐다. 아직 3회밖에 안 썼는데 나란 인간은 이렇게 끈기가 없는 인간이었나.


모르겠다, 억지로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오늘은 일단 그냥 나가자. 읽던 책이나 마저 읽으면서 느긋한 하루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핫팩 하나 주머니에 넣고 목적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마스크 안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숨을 쉴 때마다 얼굴 어딘가로 물방울이 튄다. 마스크 따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살을 에는 추위 앞에 찝찝함이 대수랴.


문득 걸어오던 길을 돌아봤다. 와, 마음속으로 탄성을 내뿜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거뭇한 산 위에 하얀 눈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러면서 겨우내 녹지 마라 녹지 마라 생각했다. 답답할 때 언제든 나와서 보게.


지난여름에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약간의 우울증이었다. 산이며 바다며, 깨끗한 공기와 한적한 길 등 아무것도 내 우울감을 없애주지 못했었다. 그러다 무엇이 나를 돌려놓은 건지 몰라도, 그냥 잊고 다시 살아졌다.


'나 정말 좋은 곳에 살고 있었구나.'

오늘 새삼 다시 깨달았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산과 맑게 흐르는 물. 이것이 배산임수인지 뭔지 몰라도, 내가 이렇게 그림 같은 곳에 살고 있었구나. 그동안 그 안에 있어서 소중함을 몰랐구나 싶었다.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확연히 보이는데.



오늘의 도착지는 테라로사. 커피를 끊었음에도 좋아하는 카페를 잃기는 싫어서 한동안 커피 대신 차를 주문해서 마셨다. '가끔은 커피도 괜찮겠지.' 하며 과감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아침식사로 함께 먹을 담백한 빵을 미리 생각해 놨었는데 너무 일찍 방문했는지 케이크와 쿠키류 밖에 없었다. 제발 이런 사소한 것 좀 미리 계획하지 말자고 속으로 생각했다. 결국 자주 먹었던 피칸 파이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담백한 빵에 자꾸만 미련이 남았다.


10년 전만 해도 출근 시간 1시간 전에 나가서 커피와 샌드위치, 케이크 같은 것을 아침으로 먹었다. 그때는 그게 참 맛있기도 했고, 하루 종일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10년 사이에 커피와 파이라는 아침 메뉴가 나와 어울리지 않게 됐다. 먹을수록 파이의 달달함은 느끼함으로 변해갔고, 향이 참 좋다고 느꼈던 커피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 10년이면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게 변할만하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직원들의 움직임이 어수선했다. 새로운 직원이 왔나 보다. (내가 먹고 싶었던) 빵은 몇 시에 들어오고, 유리창은 이렇게 닦으면 되고, 셀프바는 이렇게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신입 직원을 보니 어쩐지 부러웠다.


나도 예전에는 열성적으로 배웠고 또 누군가를 가르치기도 했다. 재밌고 보람되지만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그만두고 싶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삶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움에 나이가 어디 있냐는 말도 있지만, 내 나이는 이제 카페 하나 차려야 되는 나이니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나를 보며 이 바쁜 월요일 아침에 느긋하게 카페에서 책이나 보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프기도 하고 재밌었다. 속으로 들어와 보면 전혀 안정되지 않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무언가를 쫓고 있는 현실인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쁜 꽃집 앞을 걷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느껴졌다. 따스한 나무 문과 뾰족한 나무를 심은 화분. 화려한 장식을 해놓지 않아서 더욱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편안한 색감 또한 마음에 들었다. 우리 집 대문이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을 사진 한 장으로 달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맞은편 은행에서 달력을 받아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한동안 연말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었는데 달력을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2023년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구나.


예쁜 꽃집과 은행표 두루마리(?) 달력. 생각지 않게 오늘 하루를 더 재밌게 살아가게 할 아이템이 생겼다. 비록 내 손안에 있는 것들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서 나를 달래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해 주었다. 내일의 내가 허둥대지 않게, 오늘의 내가 뭐라도 해냈네. 잘했다. 앞으로도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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