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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12. 2023

꽃처럼 아름다운 하루



자고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시원하게 비가 오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비 오는 것을 느낀 순간부터가 시작점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탓탓탓' 쇳덩이를 부딪히며 내는 빗소리가 참 듣기 좋다.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면 애써 말아놓은 앞머리가 축 처지고 보송하던 옷이 축축해지겠지만,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반갑게 맞이하기로 했다. 그래도 바람은 안 불었으면 하는 솔직한 마음이다.


나는 다음날 일정을 전날 미리 정해두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순간의 기분에 맡기기로 했다. 오늘은 느긋하게 집에서 보내는 하루다. 맛있는 빵을 먹고 싶었지만 멀리 사러 나가기가 귀찮아서 집 앞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왔다. 비도 오고, 와인 한잔 곁들이면 딱 좋겠네. 편의점에서 저렴한 와인도 한 병 구입했다.



그리하여 조촐한 나의 브런치가 완성되었다. 언젠가는 빵을 찍어서 먹으리라 생각하며 사뒀던 단호박 수프도 끓였다. 초록이가 없으면 섭섭하니까 하나 남은 오이도 꺼냈다. 최소한의 양심이다.


작년에는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면서 탄단지 비율에 집착을 했었다. 그때 같았으면 빵 두 조각 다시 집어넣고 닭 가슴살을 꺼냈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자. 비 오는 날이니까.



몇 달 전부터였는지 몰라도, 이런 조촐한 식사가 참 좋아졌다. 그냥 꺼내고, 적당히 굽고, 살짝 깎아내는 정도. 지지고 볶고, 바글바글 끓이는 건 다른 사람이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리 블로그를 운영해 오던 내게 일종의 번아웃과도 같았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블로그에 올리기 위해서 뭔가 더 양념을 첨가하고, 가니시를 올리고, 3인 가족에게 넘칠 만큼 식기류를 구입했다. 사진 찍느라 식어버린 요리를 허겁지겁 먹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재밌었고 즐거웠다. 그런데 점점 집착을 하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힘들어지더라. 나는 왜 이렇게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를까. 적당히 즐기면서 편하게 했으면 됐을 텐데, 결국은 다 귀찮아져 버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을 의무적으로 하지 말아야지.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과 공감을 나누고 싶었고, 그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대감을 주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다. 에세이 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평소에 종종 해오던 생각들, 머릿속에 머물러 있던 생각을 글로 적어 내려 가 보고자 한 것이다. 아직 시작 단계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이 초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에는 '하이디'를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 나오는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역시 거친 빵과 치즈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주말 내내 배달 앱을 두리번거리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책을 보면서 바로 먹었으면 더 맛있었을 텐데, 배달비 4천 원을 아끼려는 마음이 먹고 싶은 마음을 이겼다. 결국은 이렇게 먹었으니 됐다. 하루 늦게 먹는다고 영양실조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안타깝게도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는 구하지 못했다. 대신 단호박 수프도 빵과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언젠가 문득 떠올렸던, 수프랑 빵을 먹으면서 책 읽는 로망(?)을 드디어 이뤘다.


먹고 나면 별거 아닌 것을, 먹기 전에는 어찌나 안달 나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특별히 당기는 게 없어서 그런가 보다. 뭔가 하나라도 떠오르면 그게 마음속 깊은 소망으로 자리 잡는다. 나도 내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점부터 낮술이라니. 하지만 딱 한 잔이다. 술집에 가서 먹을 수 없는 현실이니 집에서 가끔씩 혼자서라도 즐긴다. 소주나 맥주보다 와인이 좋은 게, 안주발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소주는 독해서 안주를 많이 집어먹게 되고 맥주는 배가 부르지만 뭔가 자꾸 당기게 만든다. 그런데 와인은 한 모금에 빵 한 조각이면 만족이 된다.


사실 어떤 술이든 살찌는 건 똑같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와인은 조금 안심이다. 한창 열심히 살을 뺐던 지난 초여름에도, 얼마나 열심히 와인을 마셔댔는지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지만...)


오늘은 14900원짜리 편의점 와인이다. 꽃향기가 솔솔 나는 게 취향 저격이다. 대형 마트에서 산 7900원짜리 와인도 맛있는 걸 보면 가격이 문제가 아닌듯하다. 하루라도 빨리 내 와인 취향을 찾는다면 가격 부담 없이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두부랑 총각김치를 먹을까 했다. 그런데 와인도 당긴다. 두부는 몰라도 총각김치와 와인, 괜찮을까? 먹어보면 알겠지. 하핫..



마트 책 코너에서 보고 마음에 들어서 가져온 책이다. 한가로이 아점을 즐기며 스르륵 훑어봤다. 학창 시절에 이분들의 시를 봤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공부라는 생각에 지겨웠던 것 같다. 그런데 20여 년이 훌쩍 지나고 다시 보니,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그 감성을 느낄만한 나이가 된 건가.


뭐든지 시기가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아이와 우주 관련 책을 보다가, 우주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는 줄 알았으면 지구과학 시간이 지겹지는 않았을 텐데 아쉽기도 했다. 할머니의 곶감이 지금 와서야 이렇게 그리 울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먹어둘걸. 시기도 시기인데, 항상 그것을 늦게 깨달아서 문제다. 나는 또 10년, 20년 뒤에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꽃보다 아름다운 하루. 책 제목을 보고 한참을 생각해 봤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뭘까. 그것의 느낌을 당최 알다가도 모르겠더라. 꽃보다 더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꽃처럼 아름다운 하루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기로 했다.


꽃은 흰색, 노란색, 빨간색 등 색깔도 다양하고 피어있는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그렇다면 삶도 그렇게 예쁜 꽃이 하나하나(하루하루) 모여 만들어진 게 아닐까.


꽃향기가 나는 와인을 마시고, 그렇게 먹고 싶었던 빵을 먹고, 예쁜 책을 손에 들고, 토도독토도독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도 꽃처럼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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