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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08. 2023

좋은 날 좋은 사람과

12월도 어느덧 중순에 접어들고 있다. 눈이라도 내리면 어울릴 것 같은 날짜에 낮 최고 기온 20도라니. 비록 미세먼지가 최악이지만 이런 겨울 날씨를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집에만 있기 아까웠다. 따뜻할 때 만나자고 그녀와 미리 약속을 잡아두길 잘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약간의 들뜬 마음을 담아 평소보다 조금 빠른 발걸음으로 걸었다. 10분 늦어지겠다는 메시지를 받고 패딩 차림으로 후다닥 아침 설거지를 했다. 언제라도 뛰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다. 한숨 돌릴 찰나에 집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는 웃으며 만났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내 표정이 궁금하다면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된다고.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저렇게 활짝 웃지는 못하겠지만 비슷하게나마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을까. 먼저 웃어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다음엔 내가 먼저 웃어봐야지 다짐한다. 오늘보다 조금 더 화사하게.



우리는 미리 점찍어둔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생각만 하고 영영 못 가볼 뻔했던 곳. 혼자 가기엔 멀게만 느껴졌던 곳. 운전을 하는 그녀 덕분에 순식간에 왔다. 따땃한 조수석에 앉아 이렇게 편하게 오다니. 감사해야 할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취향이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지만, 다행히 먹는 취향은 비슷하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조금씩 맞춰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전에 알던 사람 중에 약속을 잡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메뉴만 고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웬만하면 다 맛있게 먹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니 빈정 상하긴 하더라. '먹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참 중요한 부분이었구나'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건 부모 자식 간에 나 가능한 일이다. 다 큰 성인들끼리는 좀 맞춰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애초에 잘 맞으면 더 좋고.



우리가 선택한 카페는 핸드드립 커피도 있고, 담백한 빵을 많이 파는 곳이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가격도 참 착하다. 한때 무작정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서 다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은 가성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비싼 돈 내고 먹으려면 그곳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에 겨우 한 번 가볼까 말까 한다. 나이 먹고 까다로워진 것도 한몫한다.


문득 생각해 보니, 우리가 오늘 먹은 빵의 가격보다 커피 가격이 훨씬 비쌌다. 이래놓고 가성비 찾아서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현타가 왔다. 그래도 이미 먹은 것이고, 행복했으니까 됐다며 합리화했다. 세상일이 생각한 대로만 되는 게 아니구나.



커피를 끊고 한동안은 전혀 마실 생각이 나지 않았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즘 들어 가끔 생각이 난다. 안 마시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정도지만, 밖에 나가면 조금 더 생각이 나는 편이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카페는 가고 싶은데 막상 카페에 가면 마실 게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차를 마셔도 되지만 티백 하나에 4~5천 원씩 하는 것을 보면 손이 떨린다. 액상과당 덩어리를 마시고 싶지는 않다. 같은 가격이라도 어쩐지 커피에는 관대했던 것 같다.


그런 딜레마에 빠져 한동안 카페에 가지 않았었다. 비싸게 마실 바에 안 가겠다는 반항과도 같았다. 하지만 한 번씩 카페 나들이를 해야 기분 전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나의 소소한 행복이었구나, 무작정 다 끊는다고 좋은 건 아니구나,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고민하다가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이러다 자꾸만 생각이 나면 다시 끊어볼 작정이다. 한번 해냈으니 충분히 다시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었다. 오늘의 커피는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충분했다.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오전 10시부터 낮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눈이 부셨다. 그런데 그 눈부심이 너무 좋아서 자리를 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자리에 앉아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떤 날은 햇빛이 싫어서 그늘을 찾아 걸어 다녔는데, 오늘은 왠지 매일 만나는 햇빛이 특별히 느껴졌다.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엔 나의 끄적거림(글쓰기)에 대해 조언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내 글을 정독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그러니 더욱 소중한 한마디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귀한 시간을 내서 내게 그런 말을 해줄까. 평소 블로그에 쓴 글은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요즘 들어 작정하고 쓴 글은 다소 무거워 보인다고 했다.


 '일단 시작해 보자'라는 패기와 용기와 더불어, 나도 모르게 글쓰기에 힘이 들어갔었나 보다. 그것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너무 어렵게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더 편하게 나의 일상에 대해 써 내려가 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뭔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그것에 너무 심취해 버려서 쉽게 지치곤 했었다. 의욕만 앞서서 페이스 조절을 못한 셈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즐기지 못하면 허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잘하면 좋겠지만 일단은 재밌게 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둬야겠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우리는 조만간 또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또 재미난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겠지. 좋은 날에 또 만나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우리가 만나는 그날이 좋은 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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