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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둥이 Dec 15. 2023

걷고 또 걷고

어제는 쇳덩이를 부딪히는 빗소리가 좋더니 오늘은 비닐우산을 토닥이는 빗소리가 좋았다. 태풍급 바람만 아니면 어디든 나가자고 결심했다. 걷고 또 걸어서 토닥이는 소리를 마음껏 들어야지. 출근하는 신랑을 따라나섰다.


우리는 뚜벅이 부부다. 걸어 다니는 게 익숙하다. 신랑은 매일 왕복 1시간 거리를 걷는다. 나도 웬만하면 편도 30분 정도는 걸어 다닌다. 태풍이 와도, 폭설이 내려도 걷는다.


집 근처에 카 셰어링 서비스가 있어서 차를 살 필요가 없다. 어디 가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제든 빌려주니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유용할 수가 없다. 자가라면 꼭 해야 할 세차, 점검 등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깨끗하게 쓰고 잘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 속 편하게 빌려 타는 게 우리 부부 적성에 맞다. 오히려 주변인들이 답답해하는 현실이다. 차 없이 사는 게 뭐 어때서.



특별한 날이나 쉬는 날에 차를 빌려서 타는 것 외에는 대부분 걸어서 다닌다. 걷다 보면 별거 아닌 것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오늘 참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세차더라.' 하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있지만, 몸소 느끼면 더욱 실감 난다. 기억에 더욱 오래 남는다. 보고 듣고 만져보며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실내에 머물러있는 공기를 마시다가 밖에서 옮겨 다니는 공기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면서 우울감이 해소된다. 침대에 누워서 푹 자고 일어나야만 쉬는 게 아니다. 걷는 휴식은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쉬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오늘도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서 직접 부딪혀 본다.


똑같은 길을 걸어도 느끼는 것은 매일 다르다. 오늘은 남대천 물살이 아주 강했다. 이틀 연속 비가 그치지 않고 내려서 댐 수문을 개방했나 보다. 콸콸 쏟아져 내려가는 천(川)을 보며 걸었다. 시원하게 잘도 흘러가는구나.



남대천에는 일 년 내내 백로가 머물러 있고, 겨울이면 오리가 무리 지어 다닌다. 오늘은 오리 대신 처음 보는 하얀 새가 있었다. 신랑은 갈매기가 아니냐고 했다.


"갈매기가 바다에 있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오겠어."

"걔네들 걸음(?)으로는 여기까지 금방일걸?"


긴가민가 했지만 알 길이 없어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신랑은 출근을 했고, 나는 볼일을 보고 걸었던 길을 되돌아왔다. 갈매기 이야기는 새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때 '끼룩끼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너네 정말 갈매기였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궁금해서 찾아보니, 갈매기도 강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긴 사람들도 '내 집'이라는 안정된 공간을 두고 호텔이나 펜션에서 잠을 자기도 하니까. 갈매기들도 짧은 여행 혹은 산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된 주택과 카페가 뒤섞인 조용한 골목길을 걸었다. 예전 같으면 어디 한 군데 들어가서 커피 한 잔 마셔야 직성이 풀렸다. 이제는 그냥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매일 가는 길이라도 달리 보일 때가 있고, 어제는 못 보고 지나친 것이 오늘에서야 눈에 띌 수도 있다. 어떤 곳은 생기고 어떤 곳은 없어지기도 한다. 마음속으로 혼자 참견하고 오지랖을 부려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혼자 걷기지만 전혀 심심할 일이 없다.


반대 방향으로 우비를 쓰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보였다. 처음엔 비 오는 날도 꾸준히 운동을 하나보다 했다. 한참 걸어오다 문득, 비 오는 날 뛰는 게 좋아서 일부러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온몸을 다해 비를 맞아볼 수 있을까. 아직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언젠가는...



비 오는 날을 하루라도 겪고 나면 햇볕 쨍쨍한 날이 너무나도 감사해진다. 그리고 다시 비가 올 날을 기다린다. 목숨을 앗아가고 보금자리를 뺏어가는 천재지변만 아니라면 어떤 날씨든 감사하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미세먼지와 지구온난화 같은 현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덜한 곳을 찾아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왔고, 코로나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이미 많은 마스크를 구비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연연했다.


언젠가부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며 살게 되었다. 그러니 오히려 환경 문제가 자연스럽게 와닿았다. 집에 틀어박혀서 미세먼지 수치만 들여다보고 있을 때보다 자연과 환경을 넓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따사로운 햇볕이, 시원한 산들바람이,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솔직히 자연을 위해 뉴스에 나올만한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걷고 또 걷기에 매진할 생각이다.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고 소중함을 알고, 그래서 아쉬워하면서, 조그마한 것이라도 해보고자 하는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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