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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끝

초초보맘의 육아일기_08

by 지수연


새벽 4시 30분 새벽 수유를 마쳤다. 다시 자보려고 노력했는데 잠이 다 깨버리는 바람에 일기를 쓴다.

날짜가 지나버렸지만 이건 어제(를 가정하고 쓰는) 일기다.

어제 너무 글을 쓰고 싶었지만 못썼다. 평소 8시면 잠드는 똘이가 어젠 11시까지 안잤기 때문이다. 조금 울적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이 새로운 소설집을 낸다는 소식을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똘이를 재우고 온전히 내 시간을 갖는 것. 책을 읽거나 종이 신문을 보거나 일기를 쓰는 일상이 사라질 때 내가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 엄마로서의 하루를 마감하고 단 십 분만이라도 내 시간이 필요한데, 어제는 엄마로서의 하루뿐이었다.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경보가 울렸지만 또 공동육아나눔터에 갔다.

나랑 어떤 엄마뿐이었다. 평소 이 시간에 적어도 8팀 정도가 오기에 똘이에게 조금 미안했다.

그러나 집에서 반나절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한정된 장난감과 책을 보고 좁은 집을 탐구하는 똘이를 보는 게 힘들다. 내가 좀 더 나은 무언가를 제공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린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있을 땐, 엄마가 사용하는 단어의 양이 아기의 말에 영향을 끼친다는 다큐가 떠오른다. 불빛이 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땐 자극이 아기의 발달을 저해한다는 뉴스 기사가 생각나고, 똑같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나도 이렇게 지루한데 아기도 지루하지 않을까 고민된다.

그래서 나갔다. 나가면 똘이는 내게 관심이 덜하니까.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책임감을 내려놓고 싶어서.


똘이는 볼풀장에 서서 공 두 개를 갖고 계속 박수를 쳐댔다. 상주하고 있던 선생님 두 분이 귀엽다고 반응해 주니 똘이는 좋아서 공을 바꿔가며 계속 짝짝쿵을 했는데, 선생님들이 볼일을 보러 떠나자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자기를 칭찬해 줄 사람들을 찾았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말해줘도 똘이는 흥미가 떨어져 볼풀공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미세먼지를 뚫고 나온 d엄마와도 얘기를 나눴다. 곧 두 돌이 되는 d가 너무 의젓해서 아기기 맞나 의심이 됐다. 똘이가 d만큼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입에 발린 말을 d엄마에게 하자 아닌척하며 좋아했다. d엄마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했다. 집에서 자기는 너무 힘들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겠지… 똘이도 어딜 가든 순해서 키우기 쉽겠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말을 쉽게 한다고 생각한다. d엄마도 나처럼 오해를 받나 보다.

엄마들과 얘기하는 게 재밌다. 내 얘기는 쏙 빼고 아기 얘기만 할 수 있어서 편하다. 아기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할 얘기가 무궁무진한데 동시에 뻔하다. 이유식은 얼마나 먹는지, 낮잠은 몇 시간 자는지부터 시작해 이는 몇 개나 났는지 이앓이는 어땠는지 등등… 그런 얘기를 정신없이 하다 보면 아기는 사고를 치고 있고, 그걸 수습하러 자연스레 떠날 수 있다. 이런 스몰 토크가 재밌다는 걸 왜 낳기 전엔 몰랐을까.


공동육아방에 다녀와 똘이를 한숨 재웠다. 그동안 뭐든 하고 싶었는데 남편과 시시콜콜한 카톡을 주고받다 보니 똘이가 깼다.

오늘 회식이니 힘내라는 말을 남겨두고서…

저녁에 엄마를 호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안일을 좀 하고 오겠다고 했다. 내가 저녁을 차려줄 테니 바로 오라고 꼬셨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그래도 나는 내심 기대했다. 저번에 똘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으니까 오늘도 그쯤 오지 않을까. 그러나 엄마는 내가 예상한 시간보다 한 시간쯤 뒤에 왔고, 그 한 시간이 내겐 너무 길었는데(차라리 기대를 하지 말걸) 어딘가에서 바다 냄새가 나고 바닷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닷가 앞 포차에서 소주와 회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다.

아기를 낳기 전엔 왜 그렇게 시간이 많은 지 몰랐을까에 대해. 어제처럼 하루에 십 분도 내 시간을 못쓰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엄마는 힘들어하는 나에게 언제나 그렇듯, 지나고 보면 이때가 제일 좋을 때다, 그리울 거다, 어린이집 보내고 나면 이렇게 붙어있을 시간도 얼마 없다, 모두 감사하게 생각해라.

등등 명언집인 양 긍정적인 말을 쏟아냈고, 조금 지쳤다.

엄마가 명언을 쏟아내는 동안 다른 잡생각을 했다. 내 글이 징그러웠다. 브런치에 왜 이렇게 징그럽게 글을 쓸까. 너무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아닐까. 타인을 의식한 징그러운 글. 출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아기를 키우면서 엄마로만 사는 것이 성에 안 차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나도 성과를 내고 싶다. 성과를 내고 싶어서 너무 징그러운 글들을 쓰고 있었다. 엄마가 가고 똘이를 재우고 나면 징그럽지 않은, 새로운 글을 써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가 가고도 똘이는 자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열심히 놀아줘서 흥분한 탓일까. 11킬로 똘이를 아기띠에 메고 15분 정도 자장가를 불러줬다. 자는 줄 알고 내려놨는데 바로 뒤집었다. 두 번이나 그랬다. 허리가 나갈 것 같았다. 열심히 노는 똘이를 두고 벽에 기대 새로운 소설집을 낸다는 지인을 떠올렸다. 그때 마침 남편이 들어왔다. 술냄새가 풍겼다. 똘이는 아빠를 보고 더 흥분해 샤워하러 들어간 남편을 부르려고 화장실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뒤돌아 나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똘이가 너무 예쁘게 웃었다. 눈물이 조금 나왔는데 들키지 않으려고 나도 열심히 웃어줬다. 왜 이렇게 우울할까 생각했는데 생리할 날이 머지않았다.


5:55 am. 글을 다 쓰고 나니 한 시간이 넘게 흘렀다. 똘이가 깨기 전까지 책도 읽고 신문도 읽을 거다.

그나저나 하루에 한 시간이나 일기를 쓸 수 있나? 그건 내게 너무 사치가 아닌가?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똘이에게 고맙다. 매일 공짜 pt를 시켜주는 것에도 고맙다. 덕분에 온몸에 근육이 붙었다. 방에서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책도 읽고 신문도 읽으려 했지만 일단 자야겠다. 지금 자지 않으면 오늘 하루 엄마로 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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