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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ug 26. 2021

반려견의 시간

<무지개다리에서 만나>에 부쳐

흔히 반려동물이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1980년대 미국 또는 영국의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있으나 시기와 출처가 불분명하다보니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마가렛 마샬 손더스가 쓴 ‘뷰티플 죠의 천국’에서 처음 ‘주인을 기다리는 낙원’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여기에선 무지개다리가 아니라 풍선이었고, 이후 폴 C 담의 산문시에서 처음 ‘무지개다리’가 나오지만 이는 북유럽 신화 비프로스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것을 각색한 스티븐과 다이앤 보노프스키에 의해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거라는 등등, ‘최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반려동물을 잃은 슬픔과 애도의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을까? 인터넷에 떠도는 영문시를 의역한 것이니 이 또한 정확하진 않으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숲의 끝자락 산 기슭에
시간이 멈춘 푸른 초원이 있다

이승에서 모든 시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의 친구들이 뛰어노는 곳
여기, 이승과 저승의 사이
사랑하는 모든 영혼이 휴식을 찾는 곳

언젠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이 찬란한 곳에서 누구는 기다리고 누구는 논다
더 이상 슬픔과 고통은 없다
모두가 평온하며 생은 기쁨으로 넘친다
손과 발이 회복되었고 건강도 되찾았다
몸이 치유되었고 힘으로 가득했다
한치의 근심도 없이 풀숲을 가르며 논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냄새가 풍긴다
귀는 쫑긋해지고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갑자기 무리에서 한 마리가 뛰쳐나온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사람과 반려동물, 그들이 함께였던 그때처럼
과거에서 온 친구, 그들은 서로를 향해 딜린다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끝났다
그들이 떨어져 있는 동안 느꼈던 슬픔은
서로의 가슴 속에 환희로 바뀌었다

영원한 사랑으로 포옹한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건너간다… 함께

스티븐 & 다이앤 보노푸스키 시, <무지개다리>  전문


서로 다른 종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과 개가 유일하다고 한다. 어쩌면 ‘반려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동물  아니라 식물들도 그러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했거나 진화의 역사나 확률이 적을 , 사랑하면 사랑받는 기분을 들게 하니까 그대로  함께 하는 가까운 존재. 가족구성이 협소해지면서 우리나라에도 반려동물 인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으며 개나 고양이를 소재로  영화나 문학작품도 심심찮게 찾아   있다.


전민식의 장편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와 김애란 소설집에 수록 된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은 각기 다른 이유로 마음에 남는 작품이었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는 2012년 제 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하루 아침에 노숙자가 된 남자가 부유한 집안의 고급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job)을 하게 되면서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야기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주인공이 잡고 있는 ‘반려견의 목줄’이라는 알레고리였다. 산책시키는 것이 직업인 주인공에겐 그 목줄이 밥줄이자 자신을 나락에서 건져줄 동아줄, 또는 안전줄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목줄을 놓치고 만다. 희망과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다. 그것을 자만이고 실수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당시 유행어처럼 퍼졌던 루저(loser)가 지금은 안녕한가? 출구가 없는, 막막하고 냉혹한 현실에서 꿈 꾸는 일은 헛된 욕망일까? 이 작품은 그래도 믿고 사랑하고 연대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상처가 될지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므로.

전민식의 소설이 따뜻하면서도 뼈 아픈  잔상으로 남았다면 김애란의 <노찬성과 에반>은 슬픈 파장을 일으킨 걸로 기억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하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열 한 살 소년 노찬성은 화장실 옆 화단에 버려진 에반을 만난다.


기품어린 자세로 먼 곳을 보던 모습은 간데없고 시무룩한 얼굴로 귀와 꼬리를 늘어뜨린 채 엎드려있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는 주인을 향한 미움이나 원망보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하는 질문과 자책이 담겨 있었다. 전에도 찬성은 그런 개를 본 적이 있었다. 한밤중 갓길에 버려진 뒤 앞차를 향해 죽어라 달려가던 개들이었다.

-김애란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 중에서


할머니는 늙은 개라고 싫어했지만 찬성은 에반을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 해본 말이다. 그런데 에반이 아프다. 암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음에는… 마음이 아파서 못 쓰겠다.


그러자 그 위로 살아, 무척, 버티는, 고통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포개졌다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있잖아, 에반. 만약에 못 참겠으면… 나중에 정말 너무너무 힘들면 형한테 꼭 말해. 알았지?
에반이 끙 소리를 냈다. 찬성은 몸을 돌려 바로 누운 뒤 어둠 속 빈 벽을 한참 바라봤다.

-김애란 단편소설, <노찬성과 에반> 중에서


에반과 아픈 이별을 하게 된 찬성은 ‘용서’라는 말을 떠올린다. 책임지지 못했다는 괴로움이 죄책감이 된 모양이다. 아마도 신께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할머니처럼 찬성이도 에반에게 소리 없이 빌고 또 빌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이미 말했다. 찬성의 뺨을 핥고 찬성의 가슴팍에 두 발을 올리고 찬성의 얼굴에 머리를 비벼대면서, 고맙다고, 행복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곁에도 여섯   반려견이 있다. 나는  아이와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 문득문득 슬프다.   살이 ,  년과 맞먹다니   초가 아쉽고 소중하다. 우리가 함께  시간. 신이 외로운 사람에게 선사한 작고 따스한 선물처럼, 오늘도 나는 나의 반려견과 눈을 맞춘다.  사랑의 냄새 맡을  있도록. 옥시토신 뿜뿜~!! 너도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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