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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Oct 12. 2021

어쩔 수 없는 일

<늙은 요양보호사의 하루>에 부쳐

내가 요양병원을 떠올린 건 아버지가 세 번째 쓰러졌을 때였다. 나는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수 년 전부터 뇌경색을 앓던 아버지는 예기치 않게 마비증세를 일으키곤 했다. 처음에는 안면마비 정도로 미비하게 지나갔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그 증상은 심해졌다. 그날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고 했다. 그나마 의식이 있었고 재빨리 구급조치를 한 것이 다행이었다. 뇌경색은 골든타임이 중요하다는 건 할아버지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반신마비 상태로 8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였다.

퉁퉁 부은 얼굴에 입술은 부르텄고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말했다.

“얘야, 아빠 어떡하니.”

“엄마… 이러다가 엄마가 큰 일 나겠어요.”

나는 엄마 손을 잡았다. 간병인도 없이 아버지 식사부터 목욕은 물론 이틀이 멀다하고 이불 빨래를 하다보니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곱던 얼굴도 몰라보게 상했다. 살이 찐 것인지 부은 것인지 손마디도 두툼해졌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다는 말을 묻어버린 것이 후회되었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 부리더라도 엎고 끌어서라도 가는 건데. 나는 엄마를 진정시키며 요양병원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대학병원에는 장기입원을 할 수 없으니 요양병원에서 케어도 받고 재활치료도 하자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그 사이에 엄마도 디스크 치료도 받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어떠냐고, 내가 다 알아보겠다고 했다. 사실 알아보았다. 가사나 간병 서비스를 받으라해도 “왜 남의 손에 맡기니? 내가 멀쩡한데.”라는 엄마가 답답하고 속상해서 여기저기 검색을 해본 것 뿐이었다. 이번에는 엄마도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갈등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가 집중관리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내려온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 말은 하지 마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요양병원 시스템이  돼있다고 해도 부모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당연했다. 요양병원에 들어가면 절대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있을 테고 가족에게 버려진  같은 배신감과 소외감도 느껴질 테고 무엇보다 죽음보다 더한 외로움이 두려울 것이다. 그건 자식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합리와 효율을 앞세워  삶과 일상을 지키려는 이기심. 최선의 선택이라고 해도 자괴김이 드는  어쩔  없었다.           


누가 어디에서 엄마를 모실지, 에 대한 얘기는 매번 요양원 얘기에 부딪혔다. 모두 요양원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그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열심히 다른 의견을 내놓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서유미 단편소설, <변해가네> 중에서          


아버지는 집에서 투병을 하다가 결국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또 다시 쓰러졌을 적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도 엄마는 “금방 집으로 모실 거야.”라고 했다. 엄마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가 가면 되잖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번지는 바람에 그 조차도 쉽지 않았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전화를 걸어서 “괜찮으시겠지?”라고 묻고 또 물었다.     


서유미 단편소설 <변해가네>는 치매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는 날 딸의 출산소식을 듣는 중년부인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다. 내 엄마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 곁의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바로 내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아프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낯선 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버려졌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제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 요양원 얘기가 나오면 예전과 다른 입장, 시선에서 볼 수밖에 없겠지. 어쩔 수 없이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부탁하고 당부하고 지속적으로 자책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요양원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다. 스스로와 다른 가족에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하며 지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정하는 일에도 준비와 상의가 필요했지만 엄마를 맡기고 돌아와서 사는 일에는 더 많은 각오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엄마와 딸 사이에 선 채로 안절부절 못 했다.

-서유미 단편소설, <변해가네> 중에서


나는 요양병원에 갈 때마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마치 젖먹이 아기를 맡긴 심정이었다. 치료는 의사가 하지만 보살피는 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불과 수년 전만해도 가족이 해야할 일이었다. 그들은 늘 친절했고 아버지 일상에 대해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코로나19로 면회가 어려워졌을 적에 엄마가 매일 전화를 해도 불편한 기색없이 받아줬다. 그들은 “돈 받고 하는 일”이라고 해도 난 그게 고마웠다. 돈으로 치환될 수 없는 그 무엇 때문에. 엄마는 “싸울 때가 좋았다. 힘든 건 다 잊어버렸고 고마웠던 기억만 생각 나.”하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난 그것도 고마웠다. 간병의 굴레는 벗어났지만 그곳에 자리잡은 그리움, 회한, 아직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


우리는 조금씩 헤어지면서 산다.

적어도 하루만큼 오늘도 헤어지면서 산다.

“조금 더 잘할걸.” 엄마의 쓸쓸한 혼잣말,

그 말이 오래도록 내 곁에 맴돌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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