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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Aug 04. 2021

장녀 팔자는 따로 있나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정남은 저녁약속을 취소했다. 전날 아버지 주치의가 면담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잿빛이었다. 주치의는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 오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이 풍기는 불길한 예감으로 밤새 뒤척인 터였다. 정남은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시계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일찌감치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정남은 아버지 제1 보호자였다. 수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입퇴원을 반복했는데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집중관리실로 옮겨진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정남이 달려갔다. 첫 번째는 직장을 다닐 때였고 두 번째는 소미가 태어난 지 백일이 채 되지 않을 때였고 세 번째, 네 번째는 정남이 퇴직하고 소미도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벌벌 떨었다. 정남은 어머니 손을 잡았다. 축축했다. 슬픔이 눈까지 올라갈 틈도 없던 모양이었다. 손바닥이 울고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언니와 남동생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했다. 언니는 아이들이 유학 가서 여유가 없고 남동생은 교수임용을 앞두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게 뭐라고!

정남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알았다고, 걱정 말라고, 어머니를 다독였다. 의식을 되찾을 때마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답답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집중관리실은 정신이 번쩍 들만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자신에게 돈 쓰는 걸 끔찍히 싫어했다. 아니, 방법을 모르거나 무안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아버지 옷이나 신발을 사올 때마다 화를 냈으니까. 괜히 그래! 그래서 어머니는 “세일해서 만 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도 아버지는 집으로 가고 싶을 것이다. 의식이 돌아온다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부모는 언제까지 부모노릇을 해야 할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자식 걱정만 할까?


요양병원 지하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골랐다. 병동 간호사와 요양 보호사 간식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에겐 뭐가 좋을지 쇼케이스 냉장고를 훑어보는데 맨 윗칸에 각가지 케이크들이 놓여 있었다. 정남은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아랫칸에 있는 녹차 파운드를 샀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정남을 주치의 선생님이 먼저 발견했다. 회진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바닥에 커다란 베이커리 봉투가 놓여있는 걸 보더니 “아직 아버지는 안 뵈었나 봐요.”하면서 정남을 진료실로 안내했다. 사실 아버지에게 불안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의식이 없다하더라도.

주치의 선생님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다가 “제가 따님만 오시라고 한 이유는”하면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심장과 폐 기능이 점점 약해져서 앞으로 회복이 힘들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가족들과 잘 상의하셔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어머니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집중관리실에서 의식을 찾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며 “가능성 1퍼센트”라고 의사가 설명할 때도 어머니는 “그러니까 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1퍼센트 가능성을 안은 채 겨울과 봄을 견뎠고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정남이 병원으로 달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도삽관으로는 모자라 인공호흡기도 껴보고 폐에서 물을 뽑아낸 적도 있었다. 주치의가 전원을 권할 때마다 정남은 애원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중환자실은 모든 병원이 만원이었고 중증환자를 응급실로 옮겼다가는 1퍼센트 가능성마저 놓칠 게 분명했다.

응급상황이 닥칠 때마다 어머니가 불안정한 상태를 보여서 정남이 제1 보호자가 된 것이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딱 한번,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아버지를 보며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곧 죄책감을 느꼈다. 연명치료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만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하루만 더”라고 빌었건만, “네, 알겠습니다.” 정남은 차분하게 답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마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아버지는 편안해보였다. 새벽에 혈압이 떨어졌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거라고 요양 보호사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따님 왔어요!”라며 몸을 흔들자 아버지가 눈을 떴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에 대한 반응일 뿐이지만 정남은 귀에다 대고 “우리 아빠 잘 생겼네. 최고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 침상에 있던 보호자가 “딸이 최고지!” 라고 맞장구치면서 “딸은 부모 병을 쫒아 다니고 아들은 부모 돈을 쫒아 다닌다잖아.”라는, 하나마나 한 말을 덧붙였다. “엄마들이 그래. 자신도 딸이었으면서 아들만 최고지.”, “그것도 옛말이죠. 요즘 엄마들은 안 그래요.” 라는 말도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때는 지나쳤던 그 소리가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다시금 떠오른 건 왜 일까?




정남은 걸었다. 버스정류장도, 지하철역도 지나쳤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걷고 또 걸었다. 차도가 나오면 횡단보도를 건넜고 골목이 나오면 큰 도로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정남은 진공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고 소음만 웅웅, 주변을 검쌌다. 무작정 걷다보니 산책로가 나왔다. 정남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벤치에 앉아 한숨 돌렸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빛이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는 하지 못했지만 정남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 하세요?”

“응, 세진이네랑 세훈이네 왔어. 점심으로 네가 사놓은 고기 구워주니 어찌나 잘 먹던지.”

“정말? 저도 갈까요?”

“금방 일어날 거다. 너는 다음에 올 때 김치나 더 가져와라. 애들 한 통씩 싸줬다. 어어어, 알았어. 그래그래.” 하더니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행여나 “엄마 드시라니깐.”이라고 하면 “그 까짓 거, 내가 한다!”라고 할 게 분명했다. 서운함에 앞서 외로움이 몰려왔고  아버지를 짧게 보고 온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과 서러움이 한데 뒤엉키더니 울컥 뜨거운 것에 치솟았다.


너무하네. 다들… 항상 이런 식이었어. 이름만 봐도 그렇다. 언니는 첫 손주라고 아들에게 붙이는 “세”자를 돌림자로 썼고 나에겐 글자 그대로 “정말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는 주술 같은 이름이나 붙이고 말이다. 아무리 친할머니가 구박 했어도 그렇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남이란 이름이 효력을 벌휘했는지 막둥이 세훈이 태어났다. 샘이 많아 정남을 괴롭히던 언니와는 달리 천성이 순하고 애교도 많았지만 약골로 태어난 탓에 남동생은 어머니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을 아버지는 늘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인지 활달하고 독립적인 정남에게 “네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왕왕 했다. 그 말이 주술이 된 걸까?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넌 네가 알아서 잘 하잖니.”였다. 이름만큼 노골적인 차별은 아니었지만 정남은 요즘 신조어가 된 K-장녀 특징처럼 (쓸데없는) 책임감, (심각한) 겸손함, (습관화된) 양보에 길들여졌다. 장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남은 산책로를 빠져나오자마자 택시를 탔다. 차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자니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어머니가 언니와 남동생을 감쌀수록 정남은 그 둘과 멀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옮겼을 적에 뒤늦게 달려온 언니는 “넌 연락도 안하고, 뭐했니?”라고 정남에게 쏘아붙였다. 그것은 자책일 것이다. 아버지가 투병 중인걸 걸 뻔히 알면서 연락은 고사하고 명절에도 오지 않았으니까. 거기에 대고 미안하다고 할 건 또 뭐람. 정남은 억울했다. 언니에게 사과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남동생도 보기 싫었다. 그래도 제1 보호자 역할은 그대로였다. 장녀도 외아들도 그 자리는 탐내지 않았다. 정남은 처음으로 후회했다. 아니, 두려웠다. 아버지 상황을 설명하면 온갖 슬픔이 화살이 돼서 정남에게 꽂힐 테니까.

정남은 차창을 내렸다.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택시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분주한 소리가 났다. “뭐해?” 식탁에는 프라이드치킨이 놓여있었고 남편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왔어? 거의 다 됐어.”하면서 오븐을 확인했다. 정남은 맥주를 꺼내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말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고생했네. 많이 막혔지?”

남편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정남 앞에 앉았다.

정남은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주치의 선생님이 한 말과 아버지 상태와 요양보호사, 주변 간병인들 모습…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 걸었던 일까지, 조금은 두서없게,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남편이 “정말 힘들었겠구나.”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언급한 고기와 김치 부분에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에서 미역국을 떠 왔다.


Don’t Look Back in Angry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정남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상대가 좋을 땐 추억이 떠오르지만 화가 날 땐 모든 게 상처야.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 오늘은, 당신 생일이잖아.” 아, 정남은 짧게 탄식했다.

맞다! 생일이었지. 그래서 저녁약속을 잡았던 거고.

 마침 소미가 도착했다. “치사하게! 심부름 시켜놓고 먼저 시작한 거야?”  바람에 아버지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의논하지  했지만 단단하게 뭉쳤던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소미가 “엄마가 좋아하는 쵸코치즈 캐이크!”사왔다고 하자 남편은 “당신이 좋아하는 닭모가지라고 농담을 했다. “이제부터는 닭다리 좋아할 거야!” 남편은 웃으며 오븐에서 “소미가 좋아하는 라따뚜이 꺼내왔고 레스토랑 못지 않은 생일상이 차려졌다. 이제는 정남이 소원을  차례였다.  손을 모은 정남은 ‘그러므로,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떠올렸다.  단순한 진리.

‘나는 소미에게 어떤 엄마일까?’

정남은 문득 궁금했다.

가족도 작은 사회라서 질서가 존재하고, 희생하고 복종하는 사이가 아니라 결국 사람과 사람이 엮어가는 인간관계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이 차갑게 꽂히진 않았을까? 아직 부모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어린아이한테 말이다.  의미를 이해했을 리도 만무했다.

상처가 상처인  몰랐다가  상처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방식으로 터지거나 자신도 모르게 되물림하는 어리석음. 그것도 떠나지 않을 거라 믿는 가장 약한 존재에게

혹시, 어머니도 그랬을까?’

정남은 소미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사랑하는 내 딸!” 그러자 소미가 정남의 등을 토닥였다..”나두.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너무 좋아.” 정남은 눈물을 삼키며 “에구, 이뻐 죽겠어.”하면서 웃었다.

상처를 잘 치료하면 새 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성장을 돕지만 잘못 곪으면 자기연민이 고름처럼 새어나오기 마련인가 보다. 정남은 하모니카를 불듯 닭 모가지를 먹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시절의 정남도 보였다.


어머니 손을 잡아주렴.

전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 사랑하는 내 딸이지.

장녀도 며느리도 아니라구요.

그래, 널 안 낳았으면 어쩔 뻔 했니.

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말 한마디로 마음이 풀리는 게 가족이라지만 그만큼 상처도 깊다는 걸, 누구도 모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도 추억이 될까?


오래 생각하지는 말자.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 Don’t Look Back in Angry : 영국 록 밴드, 오아시스(Oasis)의 노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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