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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치남 Jul 16. 2024

나는 중국에서 결혼하고 중국에서 이혼했다. 05

처가의 진실 

  결혼식을 하고 장인어른의 권유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다. 기숙사나 유학생용 유스호스텔에서도 신혼을 할 수 없으니 난 감사한 마음으로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서울 강남에 오래된 아파트 느낌의 빨간색 벽돌로 지은 족히 50년은 된 듯한 건물이었다. 5층짜리 건물에 4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계단은 그냥 시멘트 바닥이었다. 처음 처갓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적지 않게 실망을 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번쩍 거리는 타일 바닥과 고급진 가구들, 거실의 샹그리라 등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처갓집은 장인어른이 회사에서 배정받은 집이다. 지금은 바뀌었지만 30년 전만 해도 직장에서 일정기간이 지난 직원들에게 아파트를 나눠 주었다.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한국에서 제일 힘든 것이 서민들이 아파트를 갖는 것인데 직장에서 나눠주다니... 그래서 맞벌이를 한 부부들은 대부분 북경에 집 두 채를 가지고 있다. 


  처갓집도 집이 두채였는데 같은 층의 다른 라인의 집이었다. 다행히 집이 붙어 있어서 벽을 뚫어 문을 하나 내고 베란다를 뚫어서 마치 한 채처럼 만들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집에 살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했다. 마흔의 나이에 교사가 되어서 혼자 어렵게 아이 둘을 키우고 어머니가 분양받았던 것은 노원구의 16평 영구임대아파트였다. 방이 두 개라 동생과 함께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도 셋집을 전전긍긍하며 10년 동안 다녔기에 주인집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지도 않고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아파튼 정말 꿈만 같았다. 처갓집에 들어간 순간 내 꿈이 단번에 이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행복했다. 잠시...

 

  처갓집에 들어가서야 장인어른이 2년 전부터 딴살림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도 장인, 장모도 내가 들어가서 살기 전까지 함구했다. 이혼수속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갑자기 막장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아내는 외동딸이었지만 외동딸이 아닌 셈이었다. 중국은 출세하려면 공산당원이 되어야 한다. 공산당원은 호적이 깨끗해야 한다. 그래서 장인어른이 이혼수속을 하지 않고 딴살림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이게 사기 결혼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바람둥이 아버지, 딸 보다 한 살 많은 여자와 동거하는 장인어른... 


  '아, 내 인생에 아비복은 없나 보다. 젠장'


  장인어른과 둘이 밤에 나가서 술도 한잔하고 사우나 가서 등도 밀어드려고 했던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아내한테 왜 결혼 전에 미리 얘기하지 않았냐고 따졌지만 그건 부모들의 일인데 무엇하러 이야기하냐고 오히려 더 당당하게 따졌다. 장모님은 눈치를 보는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물리 수도 없었다. 나중에 묘령의 여인은 우리 아들 보다 한 살 많은 딸을 낳았다. 결혼 3년 후 6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함께 만나 식사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우리 셋의 동거는 시작부터 삐걱됐다. 장모님은 조용하시고 참 착하신 분이었다. 아내와 관계가 좋지 않아서 많이 웃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결혼 후 여름에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는데 날 부르셔서 봉투도 주신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돈 생각 하지 말고 즐겁게 놀다 오게.'


  봉투를 열어보니 한국돈으로 5백만 원이 들어있었다. 장모님이 직장 다니실 때 월급이 우리나라 돈 15만 원 정도였으니 거의 평생 모은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2년 후 큰 아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너무 좋아하셨는데 혹시 우리 때문에 무리해서 갑자기 쓰러지신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아내와 내가 정말 자주 싸우기도 했고 집안 일도 아이 보는 일도 거의 장모님이 맡아서 하셨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정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언어, 문화가 다르니 정말 이건 누가 틀리다고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한 노릇이었다. 정말 사사건건 부딪혔다. 내가 꿈꾸었던 신혼생활은 한 달도 안돼서 무참하게 짓밣혔다. 


 법원을 급하게 걸어 나왔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이혼 판결을 받고 다시는 아내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했지만 이혼을 했다는 사건 자체는 뭔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3살 때부터 큰집에서 더부살이, 10살 때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아버지 없이 무시받던 시절. 그렇게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었지만 꿈은 그저 꿈이었나 보다.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다음회 : 화성에서 온 한국 남자, 금성에서 온 중국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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