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한겨울 추위가 서서히 잦아들어서 제법 뛰어놀기 좋은 시절이 돌아왔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야~~~저기 봐!”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 하늘로 커다란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이다! 불이야!” 친구들이 소리쳤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불이 난 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달렸는데 불은 아직도 저 멀리에 있었다.
어둠이 밀려와 저 멀리 화염만이 보이던 무렵, 함께 뛰어가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나 혼자만이 허허벌판 논밭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 발이 ‘푹’ 빠졌다.
무릎을 넘는 깊이의 묵직하면서도 말랑한 것, 똥통이었다.
그 똥통은 봄에 쓸 거름을 만들려고 밭의 적당한 곳에 작은방 정도의 넓이에 무릎 정도 깊이로, 배설물과 짚 등을 섞어서 묻어 놓고 짚으로 덮어 놓은 거름더미이다.
날이 어두워서인지 불만 바라보고 뛰어서인지 미처 똥통을 보지 못했다.
이런 불상사에 불구경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만도 했으나, 그럼에도 나는 다시 불꽃을 향해 달렸다.
불꽃은 마치 하늘에 쏟아지는 별빛처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어쩐지 나를 끌어당기는 유혹 같았다.
드디어 불 가까이에 섰다.
기세등등한 불꽃은 공장의 물건들을 저글링하듯 하늘로 튕겨 올렸다.
누구도 나서서 불 끄는 이가 없었고 넓은 공터에 있는 공장은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저절로 진화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용의 혓바닥 같은 붉은 불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광경은 나를 홀렸다.
어둠이 짙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용의 승천 의식 같은 광경에 온 정신을 빼앗겨버려 도저히 발걸음이 떼지 못했다.
문득 혼자 오도카니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뒤돌아보니,
어둠이 집에 가는 길을, 집어삼키듯이 온 사방을 시커먼 먹물로 채색해 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집은 어떻게 가야 하지?’
“으앙 엄마! 엄마…” 울음이 터져 나왔다.
겁이 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뛰면 뛸수록 더 짙어지는 어둠은 허허벌판을 뒤덮듯이 또 나를 덮어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뛰었다.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들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순경 아저씨가 울고있는 내게 다가왔다.
“애야! 집이 어디니?”
“중랑교 근처예요.”
“걱정하지 마. 아저씨가 집에 가는 버스 태워 줄게.”
나는 그제야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가라앉고 눈물도 가라앉았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니, 잠시 뒤에 버스가 왔다.
순경 아저씨가 운전기사에게 내려 줄 곳을 거듭 당부하는 말을 들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내 몰골과 냄새가 창피하여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모두가 나를 주시하는 듯했다. 나는 앉을 수도 없어서 내리는 문 근처에 조용히 서 있었다.
움직였다가는 여기저기 똥을 묻히고 냄새도 퍼뜨리게 될 것 같았다.
풀이 죽어서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창가에 비치는 사람들은 한명 한명이 도드라져 보였다.
다행히 승객들은 냄새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투덜거리지 않고 측은하다는 듯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 집이 저 앞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휴…
점점 더 커다랗고 환하게 다가오는 우리 집.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버스에서 내렸다.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지만, 그와 동시에 꾸중 들을 생각을 하니 겁이 났다.
가족들에게 들킬까 봐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안방의 환한 불빛 아래, 둥그런 저녁상에 모여 식사하던 가족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졌다.
아마도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다가 늦은 식사를 막 시작한 듯했다.
나는 기어들 듯 가는 목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다가 쏟아지는 눈물에 말소리가 묻혀버렸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엄마가 나의 몰골을 주르르 확인하는 게 느껴졌다.
“똥통에 빠졌어. 불구경하러 갔는데 친구들은 다 사라지고, 너무 무서워서, 어둡고… 순경 아저씨가 버스에 태워 주셨어.”
엄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수돗가로 데려가서 다리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씻겨주었다.
씻는 내내 나는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혼나지 않아 안도해서인지, 엄마 손이 따뜻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무서웠던 기억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저만치 백열등 불빛 아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과 가족들의 도란도란 얘기 소리가 내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와 온몸이 노곤해졌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내 생각 아래엔 어린 시절 ‘불구경’의 기억도 흐르고 있다.
불안 속에서 손 내밀어 준 순경 아저씨, 묵묵히 참아주던 어른들, 걱정해 주던 가족, 그리고 다리를 씻겨주던 엄마.
불꽃을 향해 두려움 없이 달릴 수 있었던 건, 그런 따뜻한 어른들이 언제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