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충재와 유리.

96화. 충재와 유리.

by 번트엄버

96화. 충재와 유리.


충재와 약속을 했던 주말이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녀석들은 외식을 하자고 했지만 나는 집에서 음식을 차렸다. 오늘의 메뉴는 돼지 안심 스테이크와 발사믹 올리브 오일 샐러드에 크림치즈 파스타였다.

집에 먹다 남은 와인도 있어서 직접 소스도 만들었다.

스테이크를 굽고 난 육즙이 남은 펜에 마늘과 올리브 오일에 와인을 붓고 우스타 소스와 식초, 설탕과 간장을 조금 넣으면 근사한 소스가 완성이 된다.

충재와 유리가 도착을 했다고 뭐 필요한 거 있냐고 연락이 왔다. 유리는 충재의 부인이 되었다. 내가 우유 일을 그만두고 난 시점부터 많이 친해졌는데 한 동안 녀석들을 보지 못했다.

“ 진짜 오랜만이다. 그렇지?”

문을 열어 주자 들어오면서 충재가 한 말이다.

“ 오빠. 진짜 오랜만이에요. 언니는요?”

유리도 인사를 건넨다. 녀석은 친구의 부인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5살이나 어린 동생이어서 마치 친동생같이 편하게 나를 대한다.

“어서 와. 오랜만이지. 어떻게 바쁘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주현이는 주방에서 열심히 상보고 있지.”

어떻게 된 것이 백수가 더 바쁜 것 같았다. 작품이 돈이 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직장에 출, 퇴근을 하듯이 작업실을 매일 같이 드나들고 있었다.

뛰어들어오듯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보고 싶었나 보다. 충재 내외가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학원을 연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갔다. 내가 결혼을 하고 그 이듬해에 충재도 결혼을 했다. 신접살림도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얻었다. 안산에서 살고 있는데 친구가 근처로 이사를 올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다.

“ 어? 쿠키가 없네? 어디 갔어요?”

녀석들은 쿠키의 부재를 빨리 알아차렸다. 쿠키가 있을 때도 유일하게 쿠키랑 잘 섞여 놀았던 녀석들이다. 다른 친구들은 쿠키를 무서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쿠키는 입질을 하는 녀석이었다. 나도 참 많이 물렸다.

“ 쿠키 다시 용인으로 보냈어. 장모님 적적하실까 봐.”

쿠키는 용인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원래 거기 살던 놈이었으니 말하면 뭐하랴.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느리지만 우리 모두는 일상으로 제 위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 오빠. 오늘 메뉴는 뭐예요? 저 배가 등짝에 붙을 거 같아요.”

메뉴가 뭐냐고 만나기 전부터 계속 물어왔지만 김새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었다. 종종 내가 요리를 해줬던 터라 기대치가 높은 녀석들이다.

“ 그러게 몇 번을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를 않아. 냄새로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충재 녀석은 감이 무디다. 그래서 만나면 재밌는 에피소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나름 기대를 하고 온 모양이다. 녀석들은 평소에 아침식사를 하지 않아 우리 집에 올 때 저녁시간에 이르기까지 한 끼만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극한의 시장 끼가 해주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는 요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래. 기대를 하고 왔다니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나. 어서 앉아 식사들 하자.”

샐러드와 스테이크는 미리 만들어 놓았다. 파스타 면도 먼저 삶아 놔서 미리 만들어 놓은 소스에 볶기만 하면 조리는 끝이다. 오늘의 요리가 이탈리아 식이다 보니 술도 와인을 준비했다.

“ 와. 오늘 칼질하는 거 에요? 와 신난다!”

유리가 메뉴의 반가움에 환호했다. 충재 또한 눈빛을 보니 스테이크가 오랜만인 것 같아 보였다.

“ 그래 자 먹자.”

미리 준비해 놓은 와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비싼 와인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살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돼지 안심은 너무 두꺼워서 절반을 저며 크기를 더 크고 간이 잘 밸 수 있도록 했다. 소고기와는 달리 완전히 익혀서 먹기에 적당했다. 고기 육수로 만든 소스도 짜지 않고 감칠맛과 단맛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배가 많이 들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기에 바쁜 녀석들이었다. 주현이도 옆에서 잘 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도 한 잔 하고 근황도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주민아. 나도 조만간에 유화를 한 번 도전해 볼까 해. 네가 조금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떤 연유라고는 말해주진 않았지만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 그래? 내가 재료 준비 도와줄 수 있지. 뭐 그리고 싶어 진 거 있어.”

강사 이후 충재 녀석은 줄곧 연필만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그 점이 의아했다.

“ 그냥 자동차 같은 거 그려 보려고. 내가 원래 공업 디자인하고 싶어 했잖아.”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본인이 그리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 가장 그림을 그리는 일에 큰 동력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러려니 했다.

“ 나중에 재료 사러 갈 때 같이 가보자.”

재료를 사서 그림을 그리는 환경을 준비하는 것이 그림 그리는 일에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번 방학 끝나면 우리 일본 여행 다녀오려 구요. 친한 동생 커플이랑 가기로 다 예약했어요.”

배가 좀 찼는지 유리 녀석도 대화 끼어들었다.

“ 그래? 돈 좀 벌었나 본데. 해외여행도 가고.”

“ 요즘 가면 제주도 여행보다도 싸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본 여행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행 상품도 싼 것들이 많았다.

“ 후쿠시마 원전 때문에 일본 여행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2011년에 쓰나미에 직격탄을 맞은 후쿠시마 지역의 안전은 그 누구라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 거기서 먼 지역이라고 들었어요.”

“ 그래도 조심해야지.”

토양과 수질까지 오염이 됐다고 가정한다면 어디라도 위험할 수 있다.

“ 그나저나 지난번에 언니가 알려준 한의원 가서 약 지어먹고 있어요. 몸에 잘 맞는 거 같아요.”

자궁이 좋지 않았던 유리는 아이를 금방 가지고 싶어 했지만 자궁 탓인지 쉽게 임신이 되지 않았다.

“ 그래. 잘됐네. 왠지 유리가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될 거 같아.”

갑상선염에 걸린 주현이는 약을 먹고 있었고 호르몬이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에는 임신을 생각할 수 없었다.

“ 무슨 소리예요. 언니. 비슷하게 가져서 비슷하게 낳아야죠.”

유리는 주현이와 손 뜨개질이라는 취미가 같았다. 같은 관심사를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은 급격하게 친해졌다.

“ 근데. 얘들아. 할 말이 있는데. 주현이 갑상선 염이래. 그래서 항진증 때문에 몸이 요즘 힘들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마냥 즐거울 것만 같던 오늘 만남에 불운의 기운이 뻗치는 것을 느낀 것이다.

“ 어떡해요? 언니.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데. 많이 힘들었겠다.”

유리가 감정이 올라왔는지 말을 잊지 못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보는 자리였다.

“ 약 먹고 관리만 잘하면 금방 낫는다고 했어. 주민이가 많아 케어해 주면 금방 나을 거야. 걱정하지 마.”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유리를 주현이가 위로한다. 좋은 일에 기뻐해 주고 슬픈 일에 서로 보듬어 주는 사이가 어느덧 되어 있었다.

“ 주민이 오빠. 와인 말고 다른 거는 없어요?”

갑자기 술이 당기는지 다른 술을 찾는다.

“ 야. 너 한약 먹는 애가 술 마시면 안 돼.”

일단 예의상 말려보기는 해야겠다. 원래 맥주를 좋아해 충재와 내가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언제나 옆에서 맥주를 따로 마시던 녀석이었다.

“ 오랜만에 언니랑 오빠도 봤는데 술 같은 술 한 잔 해야겠어요. 김충재 씨 맥주 부탁해요.”

언제나 부탁을 할 때는 정색을 하면서 김충재 씨라고 하는 유리다. 부탁을 받은 충재는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일어나서 맥주를 사러 나간다. 1도 귀찮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커플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 사 오는 김에 우리도 소주로 주종을 바꾸자. 충재야?”

“ 그래. 넉넉하게 사 올게.”

충재가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주현이와 유리는 손 뜨개질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주현이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손 뜨개질에 매진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30대의 시간을 저장할 만한 적당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잉여물이 남다 보니 그때를 떠올릴 수 있는 손쉬운 장치라는 것이었다.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저장한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철학적으로 다가왔다. 여성들이 뜨개질 삼매경에 빠져 있을 무렵, 우리는 술을 마시다가 잘 치지도 못하는 당구를 치려 밖으로 나왔다. 그저 술만 마시는 것이 싫어서 나왔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당구여서 승부가 나기도 전에 당구장을 나왔다.

“ 주민이 네가 게임을 좀 할 줄 알면 이럴 때 피시방 가면 딱 좋은데. 워낙 할 줄 아는 것이 없지?”

충재가 혀를 찬다. 고등학생 때부터 강사를 하는 시절까지 철권 오락은 같이 많이 했지만 나는 피시방에 가서 오락을 하는 것은 꺼려했다. 그 시간에 되도록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하다 보니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도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친구들과 모이면 술만 마시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 그러게 한참 할 때 나도 좀 할걸 그랬다. 하하.”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집으로 향했다. 낙엽을 밟으며 돌아가는 길은 제법 가을 같았다. 소소한 재미로 채워지는 일상들이 다시금 나를 미소 짓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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