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다. 그렇게 사납던 더위가 물러나고 기어이 가을이 왔다.
순리는 이런 것인가 보다. 기어이 제 자리를 찾아오는 일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려고 내려가면 아파트 정원 한쪽에 항상 할아버지가 계신다. 휠체어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학교 가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어른들을 가만히 바라보신다. 오늘 같은 서늘한 아침에도 무덥던 여름에도 그랬다. 오후가 되면 햇살을 받으려 자리를 옮기며 저녁까지 항상 나와 계신다.
70이 넘으신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건장함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당뇨로 인해 한쪽 발을 절단하고 나서는 거이 휠체어에 앉아 계신다. 요즘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 멀리 나가지를 못하신다.
우연히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들었던 적이 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가난한 집을 나가 서커스단에 들어갔다고 했다. 배고프고 유랑하는 그들의 고단한 삶보다 화려한 서커스공연에 푹 빠졌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서커스단원이 되어 전국을 누볐다. 이 분의 주 특기는 불 쇼. 굵은 막대 끝에 불을 붙이고 할아버지 입에서 액체를 뿜어내면 막대기의 작은 불씨는 '화아락'하고 소리를 내며 크게 일어났다. 불이 더 크게 타오를 때마다 사람들은 놀라서 환호성을 질렀고 할아버지는 더 크게 불을 키웠다고 했다. 그때 할아버지의 입에서 뿜어낸 액체는 다름 아닌 석유였다. 석유를 입에서 뿜어 내며 불을 키운 것이다.
나는 티브이에서 그런 불 쇼를 볼 때면 그것이 서커스단원들의 어떤 신비한 힘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그 사람들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불 쇼를 보면서 얼마나 환호했을까? 할아버지는 그 환호 속에 또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런데 40세가 넘어가던 어느 날 갑자기 이빨 2-3개가 우두득하고 떨여졌다고 했다. 얼마 안 가 이빨이 몽땅 다 빠져버렸다. 석유를 입에 물고 살았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전국을 누비며 넓은 세상을 살았던 할아버지는 이제 휠체어에 앉아 아파트 정원만큼의 좁은 세상을 살고 있다. 얼마나 갑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좁은 세상이든 넓은 세상이든 사람 사는 모습을 구경하는 일이 재미있어 아침마다 저녁마다 밖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사는 일은 구경하는 일인 것 같다.
사람구경, 꽃구경, 하늘구경.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엄마를 따라 아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엄마손에 끌려 어린이집으로 가고 있었다. 강아지를 끌로 산책 나온 할머니가 아직도 피어있는 백일홍을 소녀처럼 웃으며 바라본다. 차에서 내려 친구를 보자마자 재잘거리며 시끄럽게 웃는 딸아이를 바라본다. 빌라가 들어서는 공사장에는 일찍부터 인부들이 땀 흘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니 작은 오름들 마다 서서히 단풍이 들 것만 같다. 가을 냄새가 난다
세상 사는 일이 구경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이 느슨해진다. 그리고 가을 냄새와 공기가 느껴진다. 나도 이 가을을 구경하는 세상사는 일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