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더는 슬프지 않게

by 조민규

문 앞에 놓인 슬픔


몇 년 전, 온라인을 통해 정호승 시인의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접한 적이 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택배라는 물체로 물질화시킨 흥미로운 해석은 내게 슬픔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했었다. 택배는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언제 그것이 집 앞으로 배달될 것인지도 알 수 있다. 때로는 주문하지 않은 택배가 잘못 배송되어 오는 경우도 있는데, 시인은 이 개념을 빌려 슬픔을 “반송할 방법”이 없는 택배와 같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슬픔은 택배와 닮은 측면이 많다.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올 것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이 택배와 같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반송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슬픔이라는 비극을 조금이라도 대비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의 어원


(Old English) (Middle English) (Modern English)

saed —> sad —> sad




saed : 배부른, 가득 찬, (음식이나 음료를) 충분히 섭취한

sad (Middle english) : 만족스러운, 진지한, 무거운, 지친

sad (Modern english) : 슬픈, 한탄스러운


차오르는 감정


흥미롭게도 슬픔은 ‘배부름’과 ‘만족’이라는 긍정적인 개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음식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게 되면, 몸이 나른해지고 무거워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차츰 ‘배부름’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게 되었고 점차 ‘배부름’이라는 의미의 ‘saed’는 중세 영어에서 ‘무거운, 지친, 차분한’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게 되었다. 실례로 셰익스피어는 진지하고 차분한 사람을 두고 ‘sad man’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부터 그 의미를 확장해 오던 ‘sad’는 갑작스레 무겁고 어두운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로 의미가 국한되기 시작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슬픔‘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묘사하는 단어로 새로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변화들을 종합해 보면 슬픔이란 배부름과 같이 ‘가득 채워진다는 개념’에서 파생되었고, 그렇기에 쌓이면 쌓일수록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덜어내야 할 감정


슬픔이 ‘음식’과 같이 차오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넘치도록 무거워지기 전에 슬픔을 덜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슬픔을 덜어낼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슬픔’을 덜어내야 할 감정이 아닌 오히려 참고, 눌러야 하는 ‘통제적인 감정’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슬픔을 견뎌낸 사람을 우리는 ‘강인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반대로 슬픔을 덜어낸 사람을 적절히 묘사하는 단어는 갖고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슬픔이 더 슬퍼질 수 있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쌓아두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맘을 놓고 목 놓아 우는 것, 크게 소리 지르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슬픔을 덜어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슬픔이 배부르기 전에.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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