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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두고 왔을까, 성해나 소설『두고 온 여름』리뷰

기하와 재하의 이야기

by 토마토수프

최근 성해나 작가의 신작 『혼모노』가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혼모노를 읽기 전에 성해나 작가의 전작이 궁금해졌고,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소설이 『두고 온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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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사진사 아버지를 둔 기하와, 아버지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새어머니, 그리고 그 아들 재하의 이야기다. 특이하게도 시점이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기하 → 재하 → 기하 → 재하.


서로 다른 두 시선으로 같은 시간을 겹쳐서 보여주는 구성이 인상 깊었다.


기하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후,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무던하고 고집스러우며, 남들보다 한 발 늦는 아버지와 함께.

기하는 그런 아버지 옆에서 자꾸 안달을 느낀다.


manikandan-annamalai-S9qlNq16IE0-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Manikandan Annamalai


열아홉, 그 여름에 갑자기 새어머니와 재하가 가족으로 들어온다.

기하는 이 새로운 가족이 달갑지 않다.

새어머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저기요”, “그쪽이요”라고 부른다. 반면 재하는 아버지를 자연스럽게 ‘아버지’라 부르고 잘 따른다. 기하를 제외한 모두가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기하는 그 노력을 ‘애쓴다’고 여기며 밀어낸다.


재하는 심한 아토피를 앓았고, 병원에 자주 다녀야 했다. 기하는 부모님 대신 재하와 함께 병원에 간다. 그리고 병원 후엔 늘 중국집에 들러 땅콩소스 냄새가 나는 냉면을 먹는다.
그건 두 사람이 함께 나누는 거의 유일한 일상이었다. 병원과 중국냉면, 침묵의 루틴.

기하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기숙사로 떠난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거리 때문이었다.
기하를 챙겨주려 새어머니는 반찬을 싸고, 혹여 창피할까 싶어 열심히 치장을 하고, 나머지 가족들과 기하의 학교를 방문한다.
하지만 기하는 그 모든 노력을 외면한다.


나는 이 장면이 참 슬펐다. 새어머니가 안쓰럽고, 기하가 미웠다.


lilly-rum-BEY9rGVvZQM-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Lilly Rum


기하의 반감에는 아버지의 행동도 한몫한다. 필름카메라 대신 DSLR을 사자는 기하의 제안을 무시했던 아버지는 재하에게는 DSLR을 사주고, 사진 찍는 법도 가르쳐 준다. 기하가 느끼기에 그의 자리는 점점 더 옅어진다. 그렇게 가족은 균열 속에서 버티다, 결국 재하의 친아버지의 폭력과 방해로 다시 흩어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기하는 건축일을 하며 살아간다. 일이 잘 풀리는 편은 아니었고,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
바로 구글 거리뷰로 전 세계의 거리를 구경하는 것.

세계여행을 하듯 모니터 앞에서 떠돌던 어느 날, 기하는 거리뷰 화면 속에서 재하와 새어머니를 발견한다.
그곳은 재하가 운영하는 중국집이었다. 기하는 조심스럽게 그 중국집을 찾아간다.

새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재하는 오래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곧 고베로 떠날 예정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둘은 반가운 듯 반갑지 않은 듯, 어색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과거에 아버지와 함께 출사를 다녔던 인릉에 함께 간다. 아버지가 선물해준 DSLR로 기하와 재하가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 순간이 참 조용하고 따뜻하게 그려졌다.


KakaoTalk_20250704_151658368.jpg 22년 고베에서


고베로 떠난 재하는 이전보다 조금 밝아졌다.
중독이었던 게임을 끊고, 주말이면 개를 산책시키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 아주머니가 대신 인화해준 사진을 발견한 재하는, 기하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주소를 몰랐기에, 이제는 사라진 그 사진관의 주소를 써서 보낸다.
편지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이, 어딘가에는 닿았으리라 믿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기하에게 화가 났고, 새어머니는 안타까웠고, 재하는 꼭 토닥여주고 싶었다.
묵묵히 가정을 지키려 애썼던 아버지도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고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재하에게서는 희망을 보았다.

나도 예전에 고베에 하루 정도 머문 적이 있다.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후지필름 특유의 따뜻한 색감이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언젠가 기하가 고베로 여행을 가서, 재하와 술 한 잔 기울이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 여름에 못 했던 이야기를, 고베의 저녁에 풀어놓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둘이서 함께 웃고, 잠깐 울고, 그제야 조금 가까워지는 그런 장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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