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네 시.
공기조차 몸을 숨기듯 고요한 시간.
가로등 불빛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내는 거리 너머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트럭 두 대가 물류센터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디젤 엔진이 떨리는 듯 끊기고, 차 문이 '탕' 하고 열렸다.
이어지는 발소리.
나는 늘 그렇듯 조용히 조끼를 꺼내 입었다.
형광 노랑의 반사띠가 새벽 공기 속에서 불쑥 떠오르며, 오늘 하루도 나에게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오셨어요!”
한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이다. 스무 살. 수능에서 원하는 대학에 미끄러지고, 택배 배송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이 일에 발을 들인 아이.
처음 봤을 땐 그저 어리게만 보였는데, 이제는 박스를 던지는 손이 제법 단단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설익은 감정들이 번진다.
아침에 집에서 나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피곤보다 더 무거운 생각을 품은 얼굴.
“오늘도 무사히 끝내자.”
나는 짧게 인사를 대신하고, 목을 돌리며 천천히 장갑을 꼈다.
손끝에 닿는 낡은 고무의 감촉이 새벽의 차가움과 부딪혀 온기를 만든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그림자 하나.
문이다. 스물다섯.
기계처럼 반복되는 새벽. 하지만 그 안에서도 문이의 걸음은 언제나 일정하다.
“형, 어제 몇 시에 끝났어요?”
“두 시쯤.”
“전 오늘도 병원 가야 돼요. 엄마 검사받으러.”
그의 말에는 힘든 기색도, 짜증도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말하듯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 새벽, 우리에겐 말보다 눈빛이 더 진실하다.
잠시 뒤, 현장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오늘 많다~ 허허, 팔 빠지겠어!”
익숙한 쩌렁쩌렁한 목소리. 항상 작업할 때마다 “좋아! 좋아!”를 외치는
수형님이 등장했다.
1956년생. 까대기를 마치고 오후엔 주유소 야간 근무까지 하신다.
그 연세에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늘 밝게 웃는다.
“움직여야 산다니까. 죽은 사람도 입 벌리면 밥은 들어오거든.”
그가 던지는 말엔 늘 한 박자 늦은 무게가 있었다.
몸은 늙어도 정신은 젊다고, 그런 걸 스스로 증명하듯 일하시는 분이다.
가끔 그의 손을 보면, 피멍이 들었는지 붉게 부어오른 손등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절대 아프단 말을 하지 않는다.
등불처럼, 말없이 우리를 비추는 사람.
“야, 오늘도 엘리트 집합이네?”
유쾌한 농담과 함께 기팀장이 도착했다.
냉장고 수리 기사가 본업인 그는 일이 없는 날이면 이곳에서 까대기를 함께한다.
나와는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해, 말없이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다.
“형님, 근데 오늘 진짜 많아 보여요. 큰 놈들만 잔뜩이네.”
“그럼 몸 풀어. 오늘 팔뚝 터지겠다.”
우리는 웃으며 각자의 위치로 흩어졌다.
이렇게 다섯.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삶도 다르고, 내일의 계획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지만
이 새벽, 우리는 모두 같은 자세로 박스를 들고 땀을 흘린다.
누군가는 대학 대신 이 길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체력을 쓰고,
누군가는 다음 달 카드값을 생각하며 허리를 굽힌다.
같은 날 오후.
“얘들아, 접속사 정리 다시 해볼까?”
칠판 앞에 선 나는, 이제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영백쌤. S에듀학원의 영어 강사.
하루 전, 냉장 트럭 위에서 무거운 박스를 날랐던 그 사람이
지금은 고등학생들의 눈을 마주 보며 문장을 가르친다.
“선생님, 팔 왜 그래요? 또 긁혔어요?”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에서 희쌤이 내 팔을 보고 놀란다.
붉고 길게 긁힌 자국.
박스 모서리에 베인 상처.
“아, 아침에 무거운 책 나르다 그랬나 봐요.”
나는 웃으며 넘긴다.
이젠 택배 박스를 ‘책’이라고 둘러대는 게 익숙하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린다.
지켜야 할 이미지가 있고,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있다.
“요즘 수강생 피드백 좋아요. 계속 잘 부탁해요, 영백쌤.”
송원장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이들은, 동료 선생님들은, 원장님도
내가 어떤 아침을 보냈는지 모른다.
아니, 아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두 세계가 충돌하는 그 틈에서
나는 조용히, 묵묵히,
조금씩 나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