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실적이 아니라 사람을

by 영백

한때 나는,

제법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 한복판,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대학.

그 대학 캠퍼스의 벤치 위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미래를 그리던 스물셋의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실패할 일은 없다고 믿었다.

ROTC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별다른 취업 준비도 없이 입사한 제약회사 영업부.

처음 출근하던 날,

구두에 광을 내고 정장에 넥타이를 매면서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하지만 사회는,

교과서에 있던 공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실적이 좋으면,

사람들이 내게 웃으며 다가왔다.

“역시~ 우리 회사에 이런 인재가 있다는 게 자랑이야.”

하지만 회의실을 나서고 나면,

복도 끝 어딘가에서는 이런 말들이 들렸다.

“쟤, 사장 낙하산이라며?”

“사장하고 대학교 동문이라던데?”

몰랐던 사실이다.

얼굴도 뵌 적 없던 사장님이 대학 동문 선배라는 사실을 난 그때 처음 알았다.

실적이 나빠진 순간에는 더 간단했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커피를 함께 마시던 동료도,

자리에 앉기 바쁘게 노트북만 켰다.

회의실 안에서는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넌 이제 곧 빠질 애야.’

누군가의 기대도, 비난도

모두 실적 하나로 정리되는 세상.

나는 점점,

그 세계에서 내 자리가 없다는 걸 느꼈다.

하루하루가 숨 막혔다.

아침 출근길, 회전문 앞에 서면, 회전문을 돌아 다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심장이 뛰기보다 점점 식어갔다.

퇴근 후 혼자 소주 한 병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그마저도 빠지면 잠들 수 없었다.


그렇게 2년.

지하철역을 올라 회사 건물이 보이는 순간,

문득 멈춰 섰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슴이 조이고,

눈앞이 흐려졌다.

숨이 안 쉬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그렇게 회사를 그만뒀다.

백수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두렵고 조용한 일이다.

하루하루가 지나도,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다.

“요즘 뭐 해?”

“잘 지내?”

아무도 묻지 않을 때,

사람은 점점 자신의 존재를 작게 느끼게 된다.


그렇게 멍하니 누워 있던 어느 날,

핸드폰에서 울리는 “카톡!” 알림 소리.

“야, 우리 학원에 갑자기 영어선생 그만뒀다.

너 과외해 봤잖아. 일주일만 메꿔줘라. 제발.”

대학 선배였다.

입시학원을 운영 중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거절하고 싶었다.

내가 뭘 안다고?

문법은 기억도 안 나고,

고등학생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순간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

그 자체가

그땐 꽤 큰 이유였다.


첫 수업 날.

교탁 앞에 섰을 때,

손이 덜덜 떨렸다.

칠판에 문장을 쓰려다

글씨가 비뚤어졌다.

학생 몇 명이 킥킥 웃었다.

숨을 참았다.

무너지면 안 돼.

그런데 수업이 끝난 뒤,

한 학생이 나가며

나직이 말했다.

“선생님, 수업 재밌어요.”

그 말이

내 안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실적표도 아니고, 점수도 아닌

누군가의 ‘마음’이었다.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게 닿았구나.”

그날 밤,

나는 소주 없이도 잠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6개월이 지나서, 1년이 지났다.

학원 생활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진상 학부모’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고,

자기 수업 시간 줄었다고 뒷말을 퍼뜨리는 동료 강사도 봤다.

얼굴 뵙고선 “항상 응원해요” 하던 원장님이

뒤에선 내 수업을 자르고 다른 강사를 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는 거기서 버텼다.

누군가는 내 수업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선생님 덕분에 영어가 좋아졌어요”

라고 말해줬다.

그 말 한 줄이

하루하루를 지탱했다.


그러다 또 다른 학원에 이력서를 넣었다.

면접을 보고, 교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나는 영어를 가르쳤고,

그녀는 수학을 가르쳤다.

처음엔 인사만 하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학생 이름을 헷갈려하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 친구, 이름 수연이예요. 자주 틀리시더라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조금 길게, 조금 따뜻하게.

그 웃음이,

나의 다음 장을 열었다.

돌고 돌아,

내가 머무는 곳은 강의실이었다.

처음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이 생각보다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실적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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