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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Dec 20. 2021

어릴 적 상처를 안겨준 엄마가 지금은 나 몰라라 합니다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야 할까요?

용서를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사과를 받을 필요도 없어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뇌리에 깊게 새겨져서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당신의 불안과 우울이 사라진다면 백번 천 번도 더 할 수 있겠지만요. 그 형식적인 사과와 용서는 자신의 노후를 위해 딸과의 관계 회복이 너무 절실한 엄마에게만 큰 이득이 될 뿐입니다.


당연히 용서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내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있겠지요. 미디어 또는 문학만 봐도 가정사의 문제를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화해하는 모습을 극도로 미화시키기 때문에 나도 저런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런 환상에 잠기기는 너무 쉽습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그런 이상적인 교과서에 나올 만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희망이죠. 누군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투영되는 그런 인간상은 판타지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헛된 이상을 쫓는 것이 피해자를 더더욱 인간 답지 못하게 살아가게끔 만드는 거 같아요.


그 당시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 그때의 어린 자신 때문에 나에게 정서적, 물리적 등 온갖 학대를 한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볼 때마다 분노에 차 있겠죠. 하지만 평생을 함께한 엄마에 대한 책임감 또한 상당할 거예요. 어려서부터 엄마의 비이성적인 행위와 폭언, 불안정한 정서를 다 받아주고 더 나아가서는 마음을 헤아려주는 성인의 역할을 하라 요구받았으니까요. 그렇게 지낸 세월을 곱씹어 보면서 엄마에게 드는 책임감을 딸들은 엄마에 대한 연민이나 정으로 착각합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진실은 아이가 어른의 역할을 하길 강요받은 것이고 전혀 애틋한 감정이 솟아날 만한 그런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단 겁니다.


엄마와 딸 이 둘 간의 관계를 필연으로 보는데서 엄청난 비극이 시작됩니다. 아동기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된 나르시시스트 학대에 시달리다 보면 피해자는 이 학대마저도 내 인생이라는 것을 숙명으로 그리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필연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건 학습된 결과물일 뿐이죠.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을 하자면 딸과 엄마의 관계란 결국 잔인한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거 에요. 운이 좋았다면 인자한 엄마 밑에서 다른 아이로 성장했을지도요. 인생에 있어 시작점은 이래서 다르다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저 포함 나르시시스트 자녀들이 지금을 비관할 필요도 없는 게 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그냥 놓아 버리면 끝이라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세상이야 부모 자식 간은 천륜이다 뭐다 떠들어대면서 자녀에게 부양의무를 슬그머니 넘깁니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자면 아이는 철저히 부모의 의지만으로 생깁니다. 계획된 임신이었건 아니었건 아이가 착상되는 순간부터 전적으로 부모의 행위에 의해서 아이의 삶은 시작됩니다. 아이의 탓이 아니에요. 나르시시스트 엄마들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걸 아이의 탓으로 돌리죠. 이는 병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그들의 결함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입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전적으로 어른인 부모의 책임이죠. 그 책임을 다했다고 해서 세상이 그 부모에게 메달을 수여해야 하고 그 수고를 돈으로 환산해서 지급해야 합니까? 자기 멋대로 할 일을 타인에게 대가를 기대하면서 이행한다? 욕먹기 아주 쉬운 행태이죠.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책임지기’ 이건 그냥 인간 101이라는 책이 있다면 첫 장 첫 페이지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당연한걸 나르시시스트들은 그들의 성격적 결함 때문에 전혀 알아보질 못합니다.


부모로서의 그 숭고한 사랑 또한 타인이 평가 합니까? 결국 장성한 자녀가 판단해 줄 일입니다. 아이를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면서 키웠을 때 아이가 부모의 따뜻한 마음을 읽고 그로 인해 끈끈한 정과 고마운 마음이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죠. 자녀를 꾸준히 학대했으면서 훗날 먹여주고 재워준 고마움을 자녀를 상대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도 출소하는 죄수에게 숙식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되리어 직업양성 차원에서 교육을 시켜줬으면 시켜줬겠죠. 피해자들은 나르시시스트 부모 아래 자라난 이유 하나만으로 나르시시스트가 군림하는 폐쇄적인 집안환경에서 죄수처럼 자라나고 다 커서도 정말 범죄를 저지른 죄수보다도 더 반인륜적인 처우를 당하는 거죠.


아동학대란 포괄적 범위로 아이를 사지로 내 모는 행위입니다. 보호와 관심만으로도 모자랄 판에 아이를 학대를 했다는 건 부모의 도리를 하지 못 한 겁니다. 아무리 가난과 집안의 불화에 그 책임을 전가하려 해도 결과적 산물은 학대입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고 합니다. 변명과 논점을 벗어나는 궤변으로 덮어보려 노력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르시시스트가 부모로 있는 이런 가정에서 온전한 부모 자식 관계가 성립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피해자 자녀분들도 ‘자신은 그래도 보편적으로 널린 그런 가정에서 자라났고 엄마도 아빠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라면서 굳이 합리화시켜 지난날의 트라우마가 튀어나오는 걸 억제하려 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트라우마의 플래시백은 현대인에게 있어 생산적이지 못하고 특히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 같은 거죠. 열면 감당이 안 될 만큼의 폭발적 감정과 온몸에 오는 이상증세가 동반될지도 모르는 그런 폭탄 같은 겁니다. 며칠에서 수주에 까지 생활에 중대한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어떤 사고 회로를 돌려서라도 어린 시절에 당했던 학대나 정신적 충격을 축소시키고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사과, 용서와 화해를 봅니다. 사과에 대한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사과란 자신의 잘못을 인정과 동시에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개선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나르시시스트 인격장애의 핵심 문제점은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그에 대한 반감을 분노로 표출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자녀에게 학대를 했음에도 본인은 그런 적 없다 발뺌을 하는 겁니다. 계속 질문을 시도해봤자 분노 표출만 유발할 뿐입니다. 그리고 사과의 첫 번째 단계부터 막힌다는 거죠. 결점 없이 우월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항상 유지하는 것 만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을 자녀가 깰 확률은 거의 0에 가깝습니다. 이론상으로는 생후 15개월 내에 이 핵심적 믿음이 자리 잡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무의식에 생긴 내핵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르시시스트가 그나마 내면의 깊이가 어느 정도 있고 사회성이 발달이 되면 눈물도 흘기면서 그래 변하겠다 약속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용서를 해야 할까요? 용서 또한 정의를 내려보면 ‘사과를 받는 피해자의 관용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조건이 붙던 안 붙던 그건 피해자의 마음이겠지만 또 다신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어야 하므로 가해자가 변화를 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죠.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건 초인적 의지가 필요할뿐더러 수십 년의 인고의 세월과 치료를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적 여유가 수반되는 일입니다. 노년을 바라보고 있는 나르시시스트 부모가, 게다가 자신에겐 어떠한 문제가 없고 항상 모든 게 남 탓을 하는 사람에게 인격결함에 대한 치료가 웬 말이며 치료를 권하는 거 자체가 엄청난 인격모독으로 치부되겠죠? 치료를 한다고 쳐도 나르시시스트 본인 또한 아동학대나 방임의 피해자일 확률이 높은데 그 감정적 후폭풍을 감당할 만한 신체적 나이가 전혀 아닙니다. 건장한 신체나이의 성인도 병실 잡고 트라우마 테러피를 하는 판에 말이죠. 만약 자녀께서 자신이 베푼 관용으로 인해 부모의 성격이 조금이라도 변화를 할 거란 믿음에 사로잡혀 맘에도 없는 용서를 하는 거라면 이점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무한정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기엔 당신의 삶은 더 가치가 있기도 하구요.


부모에게서 사과를 받고 그 속에서 상처를 다스리려는 시도는 상처를 더 크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내 상처를 보듬어줄 그릇의 부모였다면 애초에 상처를 주지도 않았을 거고 여태껏 묵인하고 남의 탓으로 일관하며 세월을 보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남들도 가지는 그런 부모 나도 한번 내 부모에게서 찾아봤으면 하는 환상 때문에 속앓이 더는 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에서 떠나시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통해서 어렸던 시절 상처를 다스리는 것이 더 나을 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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