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아픔
박숙향은 광주의 모든 군인은 증오했지만, 자신을 파출소에 데려다준 군인에게는 지금까지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비번 날에는 용궁수산시장(경남 사천시 삼천포항에 있는 수산물 전문시장)에서 생선회도 먹고, 케이블카에서 노을 지는 바다를 보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사랑도 커져 나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다 보면 그 옛날의 악몽에서 영원히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고 냉혹했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술을 마셔 알코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박숙향은 휴직을 하기 위해서 원무과장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녀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1년정도 휴직을 했으면 합니다.”
원무과장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박 간호사, 들리는 소문으로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말이 있더군요.
병원을 위해서나 동료를 위해서 이번참에 휴직이 아닌 퇴사를 하는 것이 좋겠소.”
"저는 알코올중독자가 아닙니다. 헛소문입니다."
"다른 직원들이 박 간호사와 근무하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해요."
"저는 절대로 퇴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박숙향은 원무과장에게 너무나 실망하여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나와 버렸다.
결국 그녀는 반강제적으로 퇴사를 당했다.
김혁준의 진술에 의하면, 새로 온 원무과장은 1980년 5월에 박숙향의 오빠를 총으로 쏜 군인으로서 박숙향의 존재를 알아채고 두려워했기에 그녀를 알콜중독자로 몰아세워 퇴사를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임신도 되지 않았다.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려,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서 "늑대거미가 몸에 들어와서 간과 심장을 갉아 먹는다"라고 고함을 치면서 늑대거미를 쫓아내야 한다며 물구나무서서 헛구역질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박숙향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김혁준에게 직접적인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집 안의 물건을 조금씩 파손하며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면서 지금까지 가정생활을 이어온 것이었다.
결국 김혁준이 회사에 일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있던 박숙향은 유서 한 장 없이 우울증 등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박숙향은 광주에서 오빠가 총에 맞아 죽고, 뒤이어 탱크에 깔리는 처참한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이 보고는 치유될 수 없는 엄청난 심리적 상처를 안고 살았다. 특히 살아남기 위해 오빠의 죽음을 침묵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살아 있는 동안 훨씬 더 괴롭혔을 것이다.
K는 박숙향의 죽음을 타살 혐의점이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경찰서에 보고하였다.
원무과장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조의금도 보내지 않았다.
얼마 후 T 병원 부원장으로 승진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김혁준은 아내를 화장해 광주의 장모님 묘 옆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