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대나무숲
바람결에 살랑이는 대숲, 햇살이 잎새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그곳은 늘 푸르고 정적입니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는 속삭임이 숨어 있습니다. 바람에 스치는 대나무 잎의 소리, 그것은 마치 누군가의 깊은 한숨 같기도 하고, 혹은 속마음을 토로하는 듯한 낮은 신음 같기도 합니다. 이곳, 대나무숲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왔습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과 냉정한 시선에서 벗어나, 대나무숲에선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고민, 말하지 못했던 비밀,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슬픔과 기쁨까지도. 푸른 대나무들은 묵묵히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마치 깊은 우물처럼, 모든 이야기를 품어 안고,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합니다.
짙은 초록의 대나무들은 마치 거대한 귀처럼, 속삭이는 목소리를 섬세하게 받아들입니다. 눈물 젖은 고백이든, 벅찬 감격의 외침이든, 그 모든 것은 대나무의 푸르른 잎사귀에 스며들어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그렇게 대나무숲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힘을 지닌 공간이 됩니다. 어둠이 내려앉고 달빛이 대나무 숲을 비추면, 그곳은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대나무 잎들은 마치 별빛처럼 반짝이며, 밤의 정적 속에서 마음의 위로를 전해줍니다. 잠 못 이루는 밤, 대나무숲에 와서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어둠 속에서도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밤님 안녕하세요.
시간은 또 순식간에 흘러서 벌써 마지막 편지까지 왔네요. 사실 처음 이 편지교환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큰 힘을 받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한 통, 두 통 편지가 쌓여가며 여름밤님의 편지는 제 삶에 스며들었고, 어느덧 제 삶의 일부가 되었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 편지를 받은 시점은 아마 한라산을 등반한 뒤가 될 것 같은데요. 설산에서 맞이한 풍경은 어땠나요? 그리고 올 한 해를 위한 소원은 잘 빌고 오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지난번에 제가 봤던 설산풍경에 대해서 여쭤봤던게 떠올라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제가 본 설산은 안나푸르나라는 곳으로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에요. 제가 살면서 본 풍경 중에 가장 아름다웠고, 거기서 느꼈던 벅찬 감동은 아직까지도 생각날 때마다 떠오르곤 해요. 여름밤님께서 바라본 풍경 속에서도 깊은 감동을 느끼셨으면 좋겠네요.
갑작스럽지만 이게 마지막 편지라는게 실감이 나네요. 여름밤님의 한라산과 제주도에 대한 감상이 담긴 편지가 이제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저는 정말 여름밤님이 성숙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편지에서 인생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 제 가슴을 먹먹하게 울려왔답니다.
사실 저는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순탄하게 풀린 편이랍니다. 흔히들 말하는 한국사회에서 요구하는 계단식 성취를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하고 싶은건 대부분 도전해보고 살았기 때문이에요. 가고 싶은 대학교에 가서 배우고 싶은 학문이 있어 전과를 해보기도 했고, 인복이 많아서 좋은 분들과 많은 활동과 여러 경험을 할 기회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리고 ROTC로 군에 입대하여, 졸업 후 바로 장교생활을 거치며 취업에 대한 걱정도 없이 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2년 4개월의 군 생활 이후에는 바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19개월간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며, 삶을 대하는 저만의 가치관도 확립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귀국 후에는 코로나 시국이었음에도, 제가 지원한 회사가 코로나 특수를 받아 호황이었던 회사였기 때문에 한 번에 취업도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있게 되었답니다.
그렇다면 자랑처럼 들리는 제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느냐 하는 의문도 생기실것 같은데요. 물론 중간중간 여러 고비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제 삶은 제가 생각해도 다른이들에 비해 잘 풀렸고, 그걸 어찌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그 동안의 인생의 난이도를 너무 쉽게 살았던 벌을 받은것 마냥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일들만 생기기 시작했어요. 오랜 연인과의 헤어짐, 가족과의 불화, 회사와 사회에서 만나는 빌런들, 새로운 인연은 더욱 어려워져가기만 하는 등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몰아치기도 하고, 제 삶을 점점 깍아내려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점점 더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했고, 결국 제 자신을 바꾸기 위해 살을 빼고 크로스핏을 시작하고 당당하게 여러 경험을 다시금 시작했지만 그래도 제 마음 깊이 스스로를 짓누르는 정체모를 불안은 저를 놓아주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삶의 환기를 위해 시작한 이 편지에서 여름밤님과 소통하게 되면서, 정말 큰 힘을 얻었답니다.
저희 집에 편지가 보통 수~목요일에 도착하고 했는데, 이상하리만치 그 즈음해서 제게 감정적으로 힘든일이 계속 생긴 몇 달간이었습니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여름밤님의 편지가 없었다면 무너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만큼 많은 감사를 전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감사합니다.
서로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편지라는 소통의 형태 특성상 조금 더 조심스럽게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었기에, 마지막 편지에서야 제 진짜 고민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네요. 평소에 낯을 잘 안가리는 편인데, 이상하게 일면식 하나 없는 여름밤님의 편지에서는 더 조심하게 되었네요. 혹시나 보이지 않는 벽 같은게 느껴지셨다면 늦었지만 너른 양해를 부탁드릴게요.
이제와서 전달하는 진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난번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적어볼까합니다.
여름밤님의 완벽한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삶을 바라보는 여름밤님의 관점이나 태도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누군가에게는 완벽한 하루가 그저 일상과 같이 평범한것이 아닌 어떤 여행지, 평소에 할 수 없던 경험 등 특별함으로 색칠된 하루일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 이와 비슷하게 특별함을 강조하는 답변을 받곤 했어요. 그런데 여름밤님은 일상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행복을 말씀하신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마치 영화 어바웃타임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깨닫는 것과 비슷한 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가치관과 생각의 깊이를 갖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삶을 대하고 달려오셨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들었어요.
사실 저에게 완벽한 하루가 어떤 날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있게 부정성이 제거된 하루라고 답할거에요. 단어가 굉장히 강하긴 한데, 부정성이 제거된 하루라고 하면 제가 가는 모든 길과 일들에 지체하게 만드는 장애물이나 그 어떤 요소도 없는 하루를 의미해요. 신호등을 건널 때, 멈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초록불로 변한다거나 일을 할 때 두통이 오지 않고, 퇴근하고 나서 운동을 하면서도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서 개인기록을 세운다거나 하는 어떻게 보면 일상 속에서 특별대우를 받는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편하실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답변과는 사뭇 다른 여름밤님의 완벽한 하루는 제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저 역시 조금 더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의 태도를 견지해야겠어요. 늘 좋은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평판과 기대에 대한 부응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도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스스로를 착한 아이가 되려고 인정한다는게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저 역시 긴 여행을 다녀오기 이전에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했지만 저와는 맞지 않는 방식이었던것 같아요. 결국 여행 이후에 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나서는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나 할 말은 하는 편이고, 적만 만들지 말자라는 주의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큰 기대를 건다면, 상황에 따라 기대에 부응하려고 최선을 다하기도 그냥 모른척하기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이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는 많이 줄어든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여름밤님의 방향성이 틀렸다거나 문제가 있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추구하는 방식이 자신과 맞냐 아니냐의 문제고, 저와는 맞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마, 여름밤님도 저도 더욱 시간이 흘러가며 바뀌어갈 수도 있고 말이죠.
그리고 여름밤님이 보신바와 같이, 저는 취향이 뚜렷하고 주관도 확실한 편이에요. 그렇다고 다른이에게 이걸 강요하거나, 다르다고 불편한 티를 내거나 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사실 이런 생각이나 가치관들에 대해서 최근들어 할 시간이나 계기가 없었는데, 여름밤님과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제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고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수 있어 너무 뜻 깊었어요.
그래서 여름밤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편지 연장에 대한 고민을 100% 이해했어요. 사실 저는 이 편지가 끝날 때 러브레터에서와 같이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끝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조금 더 여름밤님과 편지를 주고 받고 싶다는 생각이 더 생겼어요.
그렇지만, 이 편지 주고 받는것이 일이 되어버리면 안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나 일이 되어서, 여름밤님의 일상에 힐링이 아닌 스트레스로 이 편지가 작용한다면 서로에게 건강한 부분은 아닐테니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적심이라는 이 사이트가 아닌 메일을 통해서 비정기적으로 소통하는건 어떨까하는 고민을 해봤습니다. 내용의 길이, 형식, 주고 받는 기간 그 어떤 것도 정하지 않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이 날 때 한 통 보내고, 받을 수 있는 그런 형식이요! 어떤 부담을 갖고 이 편지를 대하기 보단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편할 때 찾을 수 있는 그런 대나무숲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더 이상 대나무숲이 필요 없어지면, 찾지 않아도 아쉬움은 남되 후회는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편지는 어떨까 하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제 메일 주소는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이에요. 번호가 있는건 제가 예전에 쓰던 번호입니다! 그러니 저와 연결될 수 있는건 오로지 메일 뿐이에요.
혹시나 여러 생각과 고민 끝에,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가 되는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시고 메일을 보내지 않으셔도 저 역시 여름밤님과의 편지를 아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삶에서 조금 힘겨운 순간을 마주했을 때, 꺼내보는 그런 진통제 같은 역할로 말이에요.
걱정인간이기 때문에, 온전히 집중 못하실것 같다는 말을 해주셨던게 기억이 나네요.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가 걱정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을것 같아요. 스스로가 정해놓은 규격이나 정성에서 벗어나는 편지를 보내는게 걱정이시라면, 괜찮습니다. 제가 오히려 더 형식을 파괴하는 때로는 메신저인가 싶은 편지를 보낼지도 모르니까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이 편지가 도착할 때 즈음이면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이겠네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듬뿍 보내시고, 굴러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맛있는걸 잔뜩 드시는 행복한 명절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너무너무 큰 행복과 위로를 제게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디찬 겨울밤을 따뜻하고 싱그러운 여름밤으로 바꿔주신 친애하는 여름밤님의 삶에도 항상 싱그러움만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5. 01. 20, 테드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