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9-11주 차] 1년의 휴직을 시작하며
Present.
'현재의'를 뜻하는 단어이자, '선물'을 뜻하는 단어.
이를 뻔한 감성으로 풀어보면..
현재의 시간은 선물과 같으니 오늘을 잘 보내야 함을 뜻한다.
사실 나는 오늘에 충실한 사람은 아녔다.
항상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잘 다지기 위해 오늘을 보낼 뿐.
내 MBTI에서 볼 수 있듯이 INTJ로서 실제 너머를 인식(N)하는 상상력과 계획적인 생활(J)을 하는 성격 상
온전히 현재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 적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을 시작하면서 나의 가치관이 변화되었다.
앞으로 닥칠 리스크를 상상하고 고민하며 계획을 세우는 성격인 지라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걸 미뤄두는 사람이었다.
현재의 안정을 위해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익숙했고 심지어 남을 맞추기 위해 나를 미뤄두는 것도 익숙했다.
언제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돌아올 수 있겠다는 긍정의 마인드도 한 몫했다.
물론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기 전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나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고 나 역시도 간섭받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언제나 내 공간과 내 시간을 갖고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는 틈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시댁이나 친정, 남편 간섭이 없었기에 여유로이 즐거운 신혼을 보내며 내 할 일을 했다.
그래서 더욱 자만했다.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틈이 있을 거라.
아기를 낳고 나서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남의 아기에 관심조차 없던 내가 남의 아기만 보면 미소를 지으며 관찰하게 되고,
TV에서 뻔한 설정으로 나오는 아기의 모습에도 엄마 마음으로 감동받으며 보게 된다.
매일 반복되는 육아의 굴레 속 오늘이 무슨 요일이고 며칠인지 까먹더라도
아기의 생후 디데이 달력은 꼬박꼬박 넘기며, 내 밥은 못 먹어도 아기 밥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토 냄새나는 옷을 입고 씻지도 못하고 아기를 안은 채 저녁노을을 볼 때면
반복되는 육아에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쎄게 오기도 한다.
하지만 마냥 지쳐할 수도 없다. 끝이 정해진 휴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12개월 후엔 아기와 함께 있고 싶어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9-10시간은 떨어져 있어야 하니, 지금이라도 붙어 있을 때 충분한 사랑을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아기가 눈 떠 있을 때는 애정을 담아 온 마음으로 사랑을 주며 놀아주고,
아기가 잠들었을 때는 최대한 집안일과 식사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겨우 남는 내 시간이 생겼을 때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도 졸린 눈을 비비고 어깨와 허리 통증을 느끼는 몸뚱이를 움직여 책상 앞에 앉혀두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내 시간을 뺏어갈 존재가 생겼다는 것. 심지어 아기는 커 갈수록 내 시간을 더 뺏어간다는 것.
어쩌면 기꺼이 내 시간을 내어줄 이 소중한 존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짬이 나는 대로 내 시간을 알차게 써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탓하지 않는다는 것.
막연한 미래를 고민하여 현재의 소중한 내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이 굉장히 아까웠다.
당장 오늘의 내 시간을 잘 보내야만 앞으로의 일을 도모할 수 있는데...
상황이 이러하니 앞으로의 계획을 따지는 건 큰 효용을 느끼기 어려웠다.
대신에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제대로 즐기는 것에 집중하기로.
아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최대한 양질의 행복과 사랑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아기가 잠들어준 틈에는 핑계 대지 말고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당장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 사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틈내서 몰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오늘 하루가 온전히 내가 사랑하는 일들로 채워진다면,
나 자신에게 줄 선물로 이보다 큰 건 없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