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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Oct 21. 2022

슬픔의 쓸모

20대 초반에 겪었던 이별은 나를 바꾸었다.

아니 구질구질하게시리 끝난 관계에 왜 그렇게 목을 메? 자존심도 없어? 하던 오만방자한 나를 깨고

누군가의 ‘헤어졌어.’를 뱉어내는 슬픈 눈만 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버리는 이별을 배운자가 되었다.

슬픔의 시간은 슬픔을 배우게 한다.

물론 많은 슬픔을 겪었다는 경험치가 반드시 다른 슬픔을 잘 겪어내는 능력치로 발현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슬픔의 에피소드 덕에 풍부해진 슬픔 섹션들은, 나에게 꼭 쓸모가 있더라.

즐겨보았었던 ‘우리들의 블루스’의 선아를 보며 난 많이 슬퍼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나였더라면,

‘어쩜 저렇게 나약할까.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해야지.’하며 철없다 느꼈을지도.

왕년에 명랑함을 시그니처로 내세우며 살던 그때의 나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으른이 되곤 슬픔과 자주 마주한다.

슬픔이란 건 물론 수치화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 10만큼 분량의 슬픔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10만큼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 그와 반대로 또 다른 누군가는 3만큼 정도의 슬픈 일을 당했음에도 10 이상으로 슬퍼할 수 있으니까.

내 슬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누가 판단하고 측정할 수 있을까. 각자가 겪는 슬픔의 무게는 그냥 각자의 것인 거다.

나의 슬픔도 그렇다. 감사한 게 많은 삶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오는 슬픔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일 때가 많으니까.

슬퍼서, 그리고 감사한 게 많으면서도 사치스럽게 슬퍼한다는 게 또 슬퍼서. 이런 나약한 내가 참 싫어서 또 슬프다.

나의 현실에서 마주한 슬픔들은 선아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선아가 되어 함께 슬퍼하는 마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슬픔은 쓸모가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수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그저 그런 거라 여기지 않아 줄 수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온전히 그 사람의 몫만큼이나 아니 그 엇비슷하게라도 느껴줄 수 있다.

먹어본 놈이 잘 먹고,

놀아본 놈이 잘 놀듯,

슬픔도 그렇다.

슬퍼본 놈이 잘 슬프다.  

나의 슬픔은 모쪼록 그런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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