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가 있다.
성별도 같고,
나이도 13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
조금 지나면 키 차이마저 사라져 버려 쌍둥이나 다름없을,
지금도 밖에 나가면 쌍둥이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는,
그런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생후 4개월부터 어렵게 어렵게 수면교육을 하여 '아 이제 되었다'며 성급한 안도를 할 때쯤(그러니까 욕이 나온다는 18개쯤이었다.)부터 지금까지 한결 같이 나를 숙면치 못하게 하는 존재이다.
또 다른 한 아이는 비슷한 시기에 이틀 정도 수면 교육이랄 것도 없이 그냥 몇 번 울더니 스스로 잘 자기 시작했고, 지금껏 아플 때를 제외하곤 함께 자는 이가 옆에서 무슨 난리를 치건 간에 잔다.(참 이것도 생각해보니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한 아이는 생후 27개월경 약 일주일 정도에 거쳐 화장실 연습을 하더니 그냥 해치워버리더라.
또 다른 한 아이는 31개월이 된 지금도 원에서는 화장실에 간다는데 나를 호구로 아는 건지 집에서는 '조금 있다 하겠다, 팬티를 입혀주면 하겠다, 오늘은 기저귀가 아님 절대 안 하겠다.' 등등의 월령을 의심케 하는 풍부한 핑계를 대가며 내 속을 뒤집는다.(오늘도 원에서는 세 차례나 화장실에 갔단다. 아놔)
한 아이는 스스로 식사하길 기다린다면 아마 한 끼에 3시간은 걸릴 것 같은,
하지만 떠먹여 주면 넙죽넙죽 크게 가리는 거 없이(이걸 먹어야 머리가 긴다던가, 키가 쑥쑥 자란다는 등의 협상안에 곧잘 넘어온다.) 잘 먹어낸다.
또 다른 한 아이는 자신이 먹고 싶으면 스스로 잘도 먹어주지만, 그게 아니라면 입에 10분도 물고 있을, 동백꽃 용식이처럼 참으로 지 쪼대로 하는 스타일이다.
한 아이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시점까지 누가 굳이 묻지 않으면 남자 친구의 존재를 언급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문화센터 수업이 남자 선생님인 것에 대해 매주 나에게 컴플레인을 걸어댄다.
또 다른 한 아이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 남자 친구의 이름을 거론했고, 반 친구들의 이름을 물으면 남자인 친구들을 모두 호명한 다음에야 여자인 친구들 이름을 대며 그마저도 다 대지도 않는다.
한 아이는 내가 눈빛만 조금 무섭게 해도 눈이 세모 모양이 되어서는 울먹이고,
또 다른 한 아이는 ‘방에 가서 엄마랑 이야기할까요?’하면 흔쾌히 손을 잡고 진실의 방으로의 소환을 받아들이고, 벽에 붙여 세워져 있어도 무조건 활짝 진짜 아주 활짝 웃어 보인다. 그렇다. 간을 보는 것 같다. 이놈새끼.
한 아이는 인어공주의 우르슐라, 라푼젤의 마녀, 씽에서의 조니네 아빠를 몇 번 보았건 간에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거나 내가 가까이 없으면 나에게 달려온다.
또 다른 한 아이는 옆에서 함께 보던 동지가 엄마를 찾아 떠나갔건 함께 있건 그저 볼뿐이다.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이리하였을까?
지난 나의 글처럼 나도 모르는 내가 달랐던 걸까.
남들이 보면 그리도 닮았다는
두 아이는
이리도 다르다.
장담한다. 더 달라질 것이다.
두 아이가 다르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나도 모르는 내가, 다른 두 아이를 또 나도 모르게 다르게 대할 것이고,
그렇게 두 아이는 그 다른 엄마의 태도를 통해 더 다른 색깔을 더 진한 농도로 더 해 갈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한 명이고,
어쩔 수 없이 때에 따라 더 혹은 덜 마음에 드는 색채라는 것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두 아이는 어쩔 수 없이
한 명의 엄마를 공유해야 하는 공동체이자 필수 불가결하고 불가항력적 비교집단이다.
비교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비교를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치사스러운 일인지 알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그러할 것이다.
한 아이는 마음이 여리고 주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또 다른 한 아이는 자기가 어쩌지도 못하는 쪼대로 하는 자신의 스타일 때문에 자주 진실의 방에 소환되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 아픈 그들의 약점을
나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엄마의 약점에 괴롭고 아프다.
나는 학부 때부터 다중지능 이론을 주장한 가드너를 좋아해 왔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피아제도 비고츠키도 있지만 난 가드너를 좋아했다.
그의 이론이 말하고자 했던 깊은 뜻은 그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어쩐지 각 사람을 존중하는 듯한, 모든 사람에겐 반짝이는 것이 하나쯤 있다고 말하는 것 같던
그 이론이 난 좋았다.
내 마음에서 나의 이 두 친구를 비교할 때마다 나는 꼭 가드너를 떠올린다.
좋아하면 뭐하냐, 너도 결국 니 색깔을 고수하고 있는 거잖아. 하고 말이다.
이제 그들을 또 데리러 갈 시간이다.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쪼대로
각자의 시간을 또 쌓았을
그들을
이 한 명의 엄마가 함께 할 시간이다.
오늘도 한 아이의 어떠함에 흡족할 것이고, 또 성질이 날 것이다.
한 아이의 어떠함에 웃어버릴 것이고, 또 마음이 아플 것이다.
어떤 이는 진실의 방에 소환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냥 함께 신나게 춤을 추며 행복하게 그저 웃는 날로 하루가 마무리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열 명의 아이가 있을 일을 앞으로 절대로 없을 테지만
열 명의 아이가 있다면
감히 말하건대 그들은 열 가지의 색깔이 있으리라.
그래 어쩌면 두 명인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빨강과 파랑 사이, 보라 언저리 즈음의 엄마로 오늘도 살아보련다.